무적해병의 도솔산지구 전투 참전기 고석중 예비역 하사 이야기

6월은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지금 세대는 한국전쟁이 먼 옛날에 있었던 남의 일이지만 그 시대에 살아남아야 했던 임영자(80세) 님과 고석중(90세) 님께는 남다른 6월입니다. 삼례에 사시는 두 분을 만나 뵙고 그 시대가 어떠하였는지 이야기를 들어 보았습니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편찮으시다 들었는데 건강해 보이셔서 좋습니다. 어머님은 너무 고우세요. 두 분 성함하고 연세 고향이 어디인지 말씀해 주세요.

나는 임영자이고 80세, 우리 영감님은 고석중이고 90세예요. 나는 삼례에서 태어났고, 우리 영감님은 고향이 제주도예요.

제주도요? 두 분 어떻게 만나셨어요?

영감님이 병원에 계실 때 부상당한 삼례 사람이 치료를 빨리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대요. 덕분에 그 사람은 목숨을 건졌고, 우리 영감님을 생명의 은인이라고 생각했어요. 전쟁이 끝나고 제주도에 있는 영감님을 삼례로 초대했는데 그때 만났어요. 친정아버지가 신문지국장이었는데 저 양반이 매일 우리 집으로 신문을 사러 왔어요. 나는 중학교 졸업하고 양재 학원에 다니면서 기술을 배우고 있었어요. 우리 아버지가 사범학교 보내준다고 늘 말씀 하셨는데 정작 학교 갈 때가 되니까 학교를 안 보내주더라고~ (웃음) 젊을 때는 원피스에 구두를 신고 다녔지. 예쁘단 소리 많이 들었어. (지금도 무척 고우세요!^^) 내가 맘에 들었는지 나한테 아버지가 잤냐고 물어보면 잤다고 하라고 하더라고, 순진해서 그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어. 어느 날, 아버지가 고 하사가 너 달라고 하는데 둘이 잤냐고 물어보시기에 순진하게 잤다고 대답했지. 그래서 집에서 쫓겨났어! (웃음)

덕분에 아버님은 미인을 아내로 얻으셨네요~^^ 제주에서 태어나셨는데 육지의 전쟁에 참여 하셨군요! 제주도는 섬이고 당시에는 교통이 좋은 편도 아니라서 제주도나 섬은 전쟁에서 좀 빗겨 있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제주에서 전쟁에 참여하게 된 이유가 궁금해요.

시아버지가 제주에서 광주로 유학 온 제1호 학생이래요. 광주에서 공부하고 만주로 갔는데 못 먹고 생활이 고달프니까 폐병에 걸려서 영감님 3살 때 33세로 요절하셨어요. 1남 2녀인데 당시는 아들을 중하게 여기던 때잖아요. 젊은 과부한테 남은 유일한 아들이니 얼마나 중하게 키웠겠어요. 해방이 되고 제주에 4.3항쟁이 일어나는데 그때는 공산당이고 아니고를 따지지 않았어요. 젊은 남자는 무조건 끌어다가 죽이니까 시어머니가 아들 살리려고 한라산 토굴에 숨겨 놓고 밥도 비가 억수로 내리는 밤에 몰래 갖다 주고 그랬대요. 경찰은 아들 어디 있냐. 고 말하라고 괴롭히고 못살게 굴었지만 끝까지 말씀을 안 하셨대요. 시어머니가 그렇게 지키려고 애썼지만 결국 잡혀서 유치장에 갇혔는데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사람 사이에 끼어서서 발이 땅에 닿지 않을 지경이었대요. 유치장에서 불려나간 사람들은 바위를 매달아 바다에 던져서 수장시켰다고 해요. 그때 시고모가 제주에서 1등 부자였는데 하나 밖에 없는 친정 조카 구하려고 돈을 3가마니를 갖다 줬다고 해요. 그렇게 구사일생으로 살아 나왔는데 전쟁이 터지니까 군대로 끌려갔지. 전쟁 얘기는 당신이 좀 해 봐요.

우리를 데리고 통영으로 갔어. 딱 3일 M1 소총 쏘는 방법을 알려 주더라고, 그리고 배를 타고 3일을 갔는데 인천이었어. 인천에 들어갔는데 사람이 없더라고, 아무것도 없었어. 그리고는 수륙양용장갑차를 타고 이동했는데 서울에 들어간 거야. 한강에 다리가 없어서 장갑차를 타고 건너갔지. 남산에 주둔을 했는데 보급이 없으니까 하루에 깨소금 묻힌 보리밥 주먹밥 2개를 주는데 너무 배가 고파서 차라리 편하게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난방용으로 쓰려고 장작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부잣집에 있던 장작을 짊어지고 동대문 시장까지 가서 옥수수랑 바꿔 와서 먹었어. 강원도로 이동한다고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미아리고개인 것 같아. 넓은 배 밭이 있었는데. 거기서 생전 처음으로 꿈을 꿨어. 기억에도 없는 아버지가 하얀 장삼을 입고 나타나셨어.

그 이후로도 한 번도 꿈을 꿔본 적이 없어. 딱 한 번이었는데…. 아버지를 꿈에서 보니까 안 좋은 일이 있으려나, 나를 지켜주러 오셨다, 이런 생각을 했지. 그날 큰 전투가 있었는데 16살 먹은 외사촌이 거기서 전사했어. 학교 교장이 울면서 죽더라도 조국은 지켜야 한다며 애들을 전쟁터에 내보낸 거야. 전투가 치열하니까 전사한 동료를 묻어 주지도 못하고 거기를 떠났어.

 

그리고 도솔산으로 갔지. 1개 소대가 21명인데 한 번 올라갔다 오면 5명만 살아오고, 8명만 살아오고 그랬어. 우리 참호에 8명이 있었는데 밥을 먹고 화투를 치면서 쉬고 있었어. 나보다 몸집이 2배나 되는 경상도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 뒤에서 화투 치는 걸 구경하고 있는데 폭탄이 터진 거야. 다 죽고 나만 살았지.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서 눈을 뜰 수 가 없었어. 장님이 됐다고 생각했지.

병원선으로 옮겼는데 미국인 간호사가 있었어. 치료를 받고 휴가를 받아 잠시 고향에 갔다가 다시 복귀했고 전쟁이 끝났지만 머릿속에는 그 끔찍한 장면이 떠나질 않아. 요즘 사람들은 전쟁을 너무 쉽게 생각해. 전쟁을 다시는 하면 안 되는 거야. 그 끔찍함을 잊으려고 나무를 가꾸고 수석을 모았지만 지워지지 않아. 이렇게 이야기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내가 조금 선선해지면 그때 일을 차분하게 종이 써서 줄게. 그거 사용해서 만들어 봐. 내 말이 무슨 도움이 되겠어.

 

두 분께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마주한 아름다운 정원이 단순한 정원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정원을 가꾸면서 그 날의 고통을 잊으려 했지만 잊히지 않는다는 고석중 님의 아픔이 느껴졌습니다. 귀가한 후 도솔산 전투에 대해 찾아보았습니다. 미 해병이 포기한 전투를 한국 해병이 승리로 이끈 전투였습니다. 나라를 위해 하나뿐인 목숨을 희생하신 호국영령께 다시금 감사의 마음이 들었습니다. 너무 풍요로워서 소중한 희생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6월입니다.

손안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