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선물 - 장모님께 -

송 여사가 베란다에 놓인 화분들에 물을 주고 잎을 닦는다. 송 여사 얼굴이 꽃처럼 피어난다. 송 여사가 꽃잎을 쓰다듬는다. 손주들 어깨 쓰다듬듯이. 젊었을 때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던 꽃들이 나이를 먹어갈수록 더 예뻐 보인다. 산에 들에 핀 꽃을 보다가 너무 예뻐서 울컥 눈물이 날 때도 있다. 전에는 시내에 나가 쇼핑하는 것이 좋더니 이제는 한적한 곳에 가서 꽃구경하는 것이 더 좋다. 송 여사 나이 80대 중반. 언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참 숨찬 세월이었는데, 이젠 잔잔하다.

봄 산에 피는 꽃이 그리도 그리도 고울 줄이야 / 나이가 들기 전엔 정말로 정말로 몰랐네

송 여사는 오빠들만 있는 시골에서 막내 고명딸로 태어나 세상 물정 모르고 살다가 도시로 시집을 왔다. 시아버지는 무뚝뚝했고 시어머니는 무서웠다. 남편은 시동생들까지 층층이 딸린 대가족의 가장으로서 늘 엄격했다. 귀여움만 받고 자라던 친정과의 문화 차이가 송 여사를 숨 막히게 했지만,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 거려니, 운명이라 생각하고 살았다. 시동생들이 결혼하여 떠나는 만큼 자식들이 태어나서 집안일만으로도 숨 돌릴 틈이 없었다. 줄줄이 딸만 넷을 낳으니 아들 못 낳는 며느리, 시어머니 앞에서는 죄인처럼 머리를 들 수 없었다. 아들 둘을 더 낳고서야 비로소 그 집 식구로 인정받는 것 같았다. 그래도 서슬 퍼런 시어머니의 눈초리는 마냥 매서웠고 남편은 무심했다.

만약에 누군가가 내게 다시 세월을 돌려준다 하더라도 / 웃으면서 조용하게 싫다고 말을 할 테야

집안 살림이 부침을 겪으면서 젊음이 떠나고, 시부모님도 떠나시고, 자식 육남매도 다 슬하를 떠났다. 이제 대접 좀 받으며 사나 싶으니까 쭉정이만 남은 몸이 자꾸 휘청거리고 아픈 데가 많아진다. 지나간 세월이 야속하고 살아온 세상도 야속하다. 인생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도 없고 그런 거 생각할 줄도 모른다. 인생 그거 참, 뭐, 별거 없다. 그래서 차라리 지금이 좋다. 얼마를 더 살지 모르겠지만 지금이 좋다. ‘내 나이가 어때서’에 맞추어 뻣뻣한 몸 흔들어도 별 미련이 없다. 음정 박자 틀리면서 목소리가 떨려도 오늘이 소중하다.

다시 또 알 수 없는 안개빛 같은 젊음이라면 / 생각만 해도 힘이 드니까 나이 든 지금이 더 좋아 / 그것이 인생이란 비밀 그것이 인생이 준 고마운 선물

송 여사가 꽃잎을 쓰다듬으며 핸드폰에서 나오는 노래를 따라 흥얼거린다. 남편은 거실에서 몸을 뒤적이며 TV 리모컨을 누르고 있다. 겨우 끝부분 ‘고마운 선물’ 부분만 제대로 따라 부를 수 있지만 그래도 흥얼흥얼, 좋다. 요즘은 어디 가야 예쁜 꽃을 볼 수 있을까? 정말 꽃이 예쁜 곳이라면 어디든 가고 싶다. 꽃이 손주들처럼 이쁘다. 다음에 애들 내려오거든 꽃이 많이 핀 곳으로 구경 가자고 해야겠다. 고마운 선물, 고마운 선물…….

내 인생의 꽃이 다 피고 또 지고 난 그 후에야 / 비로소 내 마음에 꽃 하나 들어와 피어있었네 / (중략) / 그것이 인생이란 비밀 그것이 인생이 준 고마운 선물

<인생의 선물> 양희은 작사, 사다 마사시 작곡, 유정 노래

 

장진규(문화재 돌봄 노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