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 사전: 한옥

한옥

: 한옥 우리나라 고유의 형식으로 지은 집을 양식 건물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

 

나는 전주를 모른다. 복잡한 서울 지리도 한 번 지나간 길은 어림잡아 짐작하기도 하고 때론 정확하게 되짚어가기도 한다. 헌데 전주라는 도시는 나를 쉽게 길치로 만든다. 몇 번 다녔던 길도 이상하리만치 낯설고, 왔던 곳도 갔던 곳도 쉽게 길을 잃는다. 내비게이션이 생활화되었지만 나는 내비게이션을 믿지 않는다. 차를 세워 길을 묻고 손가락을 가리키며 길을 안내하는 우리의 역할을 앗아가 버린 이기적인 현대문물이라 치부하기 일쑤다. 물론 길에서 만나는 짧은 인연도 기대할 수도 없겠지만.

한옥마을로 향한다. 책상 서랍을 뒤져 예전에 얻어놓은 한옥마을 지도를 챙기고 카메라도 챙긴 뒤, 문을 열었다가 다시 들어와 지도며 카메라며 모두 내려놓는다. 아무것도 없이 운동화를 신고 휴대폰에 내장된 카메라만 들고선 한옥마을로 가기로 한다. 계획도 없고 대책도 없이 어스름이 깔린 초저녁 한옥마을로 간다. 어둑시니가 내려앉은 한옥마을, 골목골목이 오늘의 계획이고 여행의 목표이다.

 

시내버스에서 내리자 저녁의 향이 물씬 풍긴다. 장마는 아직 올라오지 않았고 저녁 바람은 한낮의 더위를 식히기 충분했다. 무작정 한옥마을로 이끌고 온 직장동료의 발걸음이 나보다 앞선 채 경쾌했다. 여행은 혼자보다 둘일 때 정겹다. 저만치에서 전동성당이 은은한 빛을 발하며 우리를 이끌었다. 저녁 하늘과 전동성당. 한옥마을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저녁 7시를 넘겼다. 가로등 위에 씌워진 청사초롱이 한들한들 바람에 날리고 인적은 뜸하다. 곳곳에 밝혀진 은은한 불빛이 단아하다. 경기전의 닫힌 문은 과묵했고 정문 앞 하마비(下馬碑)는 꼿꼿했다. ‘至此皆下馬(지차개하마) 雜人毋得入(잡인무득입)’. 이곳을 지나는 자는 계급의 높고 낮음,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두 말에서 내리고 잡인들은 출입을 금한다의 구절이 경적을 울리는 차들을 향해 제 덩치를 키우는 듯하다. 예전이라면 덩치 큰 수문장의 억센 손길이 호통을 쳤을지도 모를 일.

경기전의 닫힌 문이 아쉬웠지만, 오늘의 계획은 감춰진 한옥마을의 속살이다.

 

한옥마을 중심길인 태조로에서 벗어나 성심여고 앞으로 향한다. 지도도 없으니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갈 뿐. 운치 있는 찻집들이며 다양한 분식집들을 지나다 담벼락 낙서를 만난다. 뜻밖에 만난 반가운 손님 같은 낙서가 유년을 불러일으킨다. 숨바꼭질, 자치기, 비석 치기, 익살스런 친구 녀석의 큼지막한 ‘낙서 금지’. 어릴 적 친구는 잘살고 있을까?

친절한 길 안내판도 만났지만, 그 친절함은 따르지 않았다. 안내판이 가리키지 않는 곳으로 발길을 돌린다.

 

얼마쯤 지나자 오래된 고택의 문 앞에서 ‘입춘대길立春大吉’과 ‘건양다경建陽多慶’을 만났다. 오래된 풍습에 대해 반가움과 낯섦에 장난스럽게 ‘이리 오너라’라며 어설픈 양반 흉내도 내어본다. 같이 온 동료가 재치 있게 ‘거 누쇼?’라며 응수한다. 웃음소리가 담장 위로 올라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고 우리는 깨금발로 담벼락에 서서 고택을 구경했다.

옛 모습을 고이 간직한 음식점의 문을 열고 들어서서 고상하게 꾸며진 정원도 관찰하고 잘 닦인 길을 걸으며 황톳길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한옥마을의 밤이 피기 시작했다.

 

이젠 좀 더 후미진 골목을 향했다. 숨겨지거나 가려진 것들에 대해 더욱더 애착을 갖는 버릇 때문일까? 어둑어둑한 골목길에 비춘 가로등 빛 사이로 오래된 담장과 창문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창문을 두드리면 양 갈래로 머리를 딴 소녀나 까까머리 중학생이 문을 열 것만 같은 정겨움. 문 앞에 나와 앉아있던 할머니께서 두리번거리며 다가오는 우리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신다. 어디서 왔느냐? 나이는 몇이고 결혼은 했느냐? 할머니의 질문에 이것저것 대답했더니 어느 음식점이 맛나고 어떤 찻집이 전통적이고 볼 것이 많다고 알려주신다. 잊고 있던 허기가 우리에게 허겁지겁 달려들었다.

작은 골목길을 조금 더 돌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골목에서 방향을 잃었다. 이쪽으로 가면 경기전이 나올 듯해서 발을 재촉하면 경기전과 더 멀어진 것도 두어 번이었다. 길을 헤매면서 길가에 핀 꽃을 만났고 칠 바란 철문도 만났다. 담벼락에 손바닥을 그으며 촉감도 느꼈고 남의 집 대문에 잠깐 앉아 숨을 돌리기도 했다.

 

골목길에서 나와 태조로로 향하면서 2층 한옥을 만나기도 했다. 집 구조를 한참 동안 바라보면서 동행자와 함께 만든 연대를 추측해보기도 하고 한옥과 일식집이 섞여 있는 구조라며 어설픈 짐작도 했다. 집의 연대기에 대해 상상했고 집 앞 도로의 생김새를 보며 예전엔 꽤 유명한 상가였을지도 모른다는 상상도 했다. 한옥마을 한복판에 밤이 피었고 우리의 상상력도 피었다.

 

식사보다는 간단한 요기를 택했다. 물론 허기가 심했지만 전통차를 마셔야겠다는 욕심이 한 발 더 앞섰기 때문이다. 태조로에 나와 전통 찻집을 찾으면서 눈에 거슬리는 것들이 하나둘씩 눈에 띄었다. 정체불명의 네온사인 간판들이며 영어로 환하게 밝힌 빵집과 편의점 그리고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신식한옥들. 옹기종기 모여 한복의 곡선과 단아함을 연상시켰던 한옥들은 자꾸 뒤로 감춰지고 크고 우람하면서 피골이 장대한 한옥들이 태조로 주위를 점령했다는 느낌. 정체불명의 형형색색이 밤거리를 환하게 비추는 모습을 보면서 불편한 아날로그가 그립다는 생각. 두 사람은 애써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리운 차향과 발의 고단함을 잠시나마 잊게 해줄 찻집으로.

 

 

김성철

시인. 시집으로 『달이 기우는 비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