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이 많아 얻은 지명, 어전리의 근현대 100년사 3

5. 어전리 농사여건과 변천과정

 

1) 어전리 홍보문구는 ‘명품쌀’

 

삼례 사람들은 삼례 일대에서 밥맛이 가장 좋은 쌀로 ‘어전쌀’을 꼽는다. 어전리 사람들도 이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하다. 그러면서도 썩 달가워하지는 않는다. 지금 와서 쌀이 좋고 밥맛이 좋아봐야 뭐하냐는 식이다. 이렇듯 농촌에서도 벼농사지대는 아무런 보람이나 영화를 누리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여기는 질땅이라 물이 안 빠져서 하우스를 못합니다. 오로지 벼농사만 해요. 농민의 날 행사장에 가면 어전리는 ‘명품쌀’이라는 홍보문구를 붙여놓습니다. 내세울 게 그것밖에 없어요. 해전은 수박자랑, 신금리는 딸기자랑하는데 우리는 밥맛밖에 없어요. 공장이 있나, 짐승을 키우나, 하우스를 하나, 그런 게 없으니까 깨끗하고 청정하기는 합니다.”1)

 

정관옥의 위 말 속에는 현단계 농가소득의 현실이 담겨 있다. 즉 공장지대여서 부동산 가치가 있거나, 축산을 하거나, 원예농업을 하지 않으면 농촌에서 소득을 올리기 힘들다는 점이다. ‘청정하기는 하다’는 말이 자조적인 말로 들릴 수밖에 없다.

 

 

어전리 쌀이 명품인 까닭은 말 그대로 ‘질땅’이기 때문이다. 삼례의 토질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비비정 동부지역은 대부분 사석토양이다. 만경강 충적지이기 때문이다. 예외로 신금리나 석전리 북쪽지대 일부는 질땅(점질토)을 형성하고 있다. 비비정 서부지역도 남북으로 토질이 다르다. 남쪽지역인 해전리 일대는 이른바 사질양토이다. 갯벌의 퇴적 위에 사석이 충적된 토양이다. 따라서 물빠짐도 적당하고 심토가 깊은 편이다. 북쪽지역인 해전리는 질땅 혹은 마사토 성질의 황토지대이다. 질땅은 애초에 늪이었고 황토는 본래 구릉지였다.

질땅은 물을 오래 머금고 있어서 벼농사의 적지이다. 벼가 본래 수생식물이기 때문에 물을 오래 간직할수록 쌀이 단단하고 밥이 찰지다. 반면에 사석땅은 물이 헤플 정도로 잘 빠져서 쌀이 야물지 못하고 밥이 퍼석거린다. 그래서 “사석땅 쌀은 ‘근대’로 사고, 질땅 쌀은 ‘되’로 사라”는 말이 전한다. 사석땅 쌀은 무겁지 않으니 저울 무게로 사야 제대로 사는 것이고, 질땅 쌀은 무게가 많이 나가니 양으로 사라는 말이다. 심지어 “질땅 쌀 먹으면 송장도 무겁다.”고 할 정도이다.

어전리는 질땅이어서 보리농사가 힘들었다. 이모작이 어려운 지역이다. 보리는 물하고는 상극이다. 물빠짐이 좋은 땅에서 잘 자란다. 사석토라서 쟁기질한 흙덩어리도 잘 깨진다. 사석토는 겨울에 흙이 얼었다가도 녹으면 잘 풀어진다. 반면에 질땅은 찰기가 강해서 흙덩어리가 여간해서 깨지지 않는다. 흙이 얼었다가 녹아도 덩어리채 붕 떠 있다. 보리가 냉해를 입기 십상이다. 질땅 동네는 보릿고개 시절이 더 참혹할 수밖에 없다.

 

“여기는 보리를 심어도 잘 안됩니다. 안 심으면 굶어 죽으니까 조금씩은 심었지만 힘들어요. 경운기 나오기 전만 해도 쇠스랑으로 흙을 치면 깨져야 하는데 흙은 깨지지 않고 어깨만 빠져요. 다행히 중간에 봄보리 종자가 나와서 그건 많이 심었어요.”

 

2) 어전리 도작지대와 전작지대

 

어전리는 동서로 가로지르는 대간선 수로를 기준으로 남북의 지질이 완전히 상반된다. 남쪽은 평야지대이고 북쪽은 구릉지대이다. 그래서 남쪽은 벼농사지대이고 북쪽은 밭농사지대이다. 경지정리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본래 밭농사지대를 후대로 오면서 논으로 개간했으니 계단식 ‘다랭이’ 농지일 수밖에 없다. 반면에 대간선 남쪽지역은 일제강점기 때 경지정리가 끝났으며, 대간선을 통한 농업용수가 이미 백년 전에 갖추어진 곡창지대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이엽사농장의 한 복판이었다.

 

“옛날에 이엽사농장이라고, 농장 있던 자리는 내가 알아요. 대간선 수로가 해전 쪽으로 약간 구부러진 제방이 있는데, 거기에 있었습니다. 농장 관리인이 근무하던 사무실같은 집이 있었어요.

대간선 위쪽으로는, 나 한 열 두서너 살 때만 해도 주변이 야산, 구릉이었습니다. 그래서 묫자리가 많았고, 맨 뽕나무만 있고, 밭이나 쪼매 해먹고 그런 디에요. 밭에는 고구마하고 ‘스슥’[서숙]을 많이 심었어요. 스슥은 조[粟]를 말합니다. 수수는 밥이 안 되지만 스슥은 밥이 됩니다. 조밥입니다. 이 위로는 물이 없어서 모를 못 심고 그랬어요. 여기는 다 천수답, 봉답이었어요. 대간선이 바로 눈앞으로 지나가도 길 건너는 천수답이에요.”

 

물사정도 다르다. 대간선 수로 남쪽으로는 전익수리조합의 몽리구역으로 수리안전답이다. 반면에 북쪽으로는 지대가 높아서 대간선수로 물을 끌어다 쓸 방법이 없었다. 그러니 계단식 농지인데다가 천수답이었다. 여건이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해방 후 익산 왕궁의 ‘주교저수지’를 수원(水源)으로 <주교수리조합>이 설립되었다. 어전 북쪽지역은 오히려 주교저수지 물로 농사를 지었다. 문제는 저수지 규모가 너무 작어서 상시적인 물 기근에 시달렸다는 점이다.

 

“대간선 수로가 어전리를 가르고 지나가는데, 우리 마을을 포함한 대간선 북쪽은 전체 면적의 3분의 1정도 됩니다. 남쪽이 3분의 2이고요. 북쪽은 대간선 물을 못 댔어요. 그래서 왕궁면 온수리에 있는 주교수리조합 물을 끌어다가 댔습니다. 주교저수지에서 여기로 오는 조그만 수로가 있었는데 수로가 작아서 여기까지 물이 오더라도 물대기가 아주 힘들었습니다. 윗논을 대야 아랫논을 대던 시절이라 물코싸움도 많았고, 왕궁 다 먹고 남아야 물이 내려옵니다. 왕궁에서 쌍정리, 신왕 거쳐서 어전리로 오니까요.”

 

3) 어전지구 경지정리사업과 양수장 설치

 

어전지구 농지개량사업이 1970년 12. 26 ~ 1971년 6. 15일까지 시행되었다. 사업시행자는 전북농지개량조합이었다. 이때 어전리에 해당하는 구역은 대간선 수로 북쪽, 즉 지금까지 살펴본 계단식 다랭이논 지대이다.

1970년 말에 시행한 <어전지구 경지정리사업>은 익산군 춘포면 쌍정리, 완주군 삼례읍 후정리, 어전리가 대상구역으로써, 구역면적 129.04 정보이며, 몽리면적 123.03 정보였다. 경지정리한 농지는 330필지이다. 총공사비는 21,524,000원이 소요되었다. 공사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사 시행자는 전북농지개량조합(조합장 문종열)이고, 도급업자는 문화실업2)이었다.

 

① 용수지선(用水支線) 10조(條) 5,096m

② 용수지거(支渠) 10조 3,008m

③ 용배수지거(用排水支渠) 15조 3,007m

④ 배수로 6조 2,506m

⑤ 배수지거 11조 3,165m

⑥ 농로 6조 1,084m

⑦ 공작물 83개소

 

 

 

 

 

그런데 경지정리한 결과가 완벽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때만 해도 기술력이나 경험이 완전하지 않을 때이다. 이후 다시 공사가 진행되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했던 대간선 남쪽구역도 농로가 없어서 농로를 새로 냈다고 한다. 그때가 2006년~2007년이라고 한다.

 

“여기도 경지정리를 두 번 했습니다. 앞뜰(대간선 남쪽)도 두 번 했어요. 앞뜰도 농로가 없고, 수로가 잘못되어가지고 새로 했어도. 일제 때 했어도 농로가 없었어요. 그래서 농로를 새로 했어요. 거기 두 번째 할 때가 내가 이장할 때인게 200~7년 정도인 것 같네요. 앞뜰을히거 2년 뒤에 여기도 두 번째로 다시 했어요. 여기도 앞뜰과 마찬가지로 수로가 잘못되고, 농로가 없었어요. 새로 경지정리를 하면서 농로를 그때사 냈어요. 설계를 엉터리로 했는지 경지정리사업을 두 번에 걸쳐 했어요.”

 

 

어전지구 농지개량사업을 1970년 12. 26 ~ 1971년 6. 15일까지 시행했으니 계단식 다랭이논은 완벽한 격자식 농지로 탈바꿈되었다. 농경지 모양은 앞뜰과 다름없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가 남았다. 어쩌면 농지개량보다 더 핵심적인 부분이 해결되지 않았다. 물공급 문제이다. 대간선 수로를 옆에 두고도 개량한 농지에 용수를 공급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공급량이 태부족인 주교수리조합 수로를 여전히 이용해야 했다. 이렇게 되면 농지개량사업의 성과가 반감될 수밖에 없다.

1996년, 어전양수장이 설치되었다. 드디어 대간선 물을 공급받을 수 있게 되었다. 경지정리사업이 끝나고도 25년이 지난 후였다. 그러니까 순차대로 정리하자면, 1970년 어전지구 1차 경지정리→1996년 어전양수장 설치→2007년 대간선 남쪽 2차 경지정리→2009년 대간선 북쪽 2차 경지정리 순이었고, 그 순차만큼 농사여건이 한 단계씩 바뀌어 온 것이다.

 

“우리동네 어전양수장에서 대간선 물을 북쪽으로 밀어올린다. 도로 밑으로 관을 묻어서 쌍정리교회 밑에까지 올린 뒤, 거기서부터 기존 수로를 타고 물이 내려오는 방식입니다. 그러면 그 물이 내려오면서 쌍정리, 신왕, 반도, 입석을 거쳐서 어전으로 되돌아와요.

그런데 어전리는 양수장에서 올라가는 수로에 수문을 만들어서 수문만 열면 올라가는 물이 어전 논으로 직접 들어오게 만들었어요. 틀기만 하면 나옵니다. 쌍정리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는 물을 굳이 안 먹어요. 그래서 물사정이 좋습니다.”

 

4) 에필로그

 

정관옥(80세, 1942년생)은 부친이 동산촌(현 전주시 조촌동)에서 결혼과 함께 분가해 어전으로 입향하였다. 부친은 1906년생이다. 1980년에 작고하였다. 부친이 26세 쯤에 결혼했을 것이라는 정관옥의 기억이 사실이면 1931년에 어전리로 입향하게 된다. 그 시점에 어전・해전뜰이 경지정리 되었을 것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정관옥에 따르면 아버지가 어전리로 들어올 때는 “아무것도 없이 몸뚱이만 오신 거다. 여기 와서 품팔아서 먹고 사셨다. 소작농이었거나 머슴으로 일하셨을 것이다.”고 솔직하게 토로한다. 1931년 무렵은 익산천 제방공사가 마무리된다. 익산천 제방공사는

이어서 만경강 개수공사가 1938년까지 수년간 지속된다. 장관옥에게 재차 확인하였다. 아버지한테 “제방공사 할 때 인부로 일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익산천일수도 있고, 만경강일수도 있다. 공사현장에는 인근에 사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당시 조선인들은 모두 품팔이 노동자에 불과했다.

어전리에는 도씨 일가가 지주로 살았다. 일본인 지주가 이 마을에 산 것 같지는 않다. 대장촌이 가까운 거리여서 일본인 지주들은 그곳에 모여 살았다. 전옥수리조합 설립 발기인이나 조합원 명단을 보면 확인할 수 있다.

정관옥의 부친도 어전리에 정착하면서 도씨 일가의 소작농일 가능성이 높다. 이 또한 정관옥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필자가 아버님은 언제쯤 자가농지를 장만하셨는지, 몇 필지나 농사지셨는지, 혹시 상환냥을 아는지 등을 묻는 과정에서 기억을 찾아냈다.

 

“내가 어려서는 소작논을 구입할 때는 논값이 쌌어요. 한 필지에 쌀로 15개도 되고 20개도 되고 그랬어요. 우리 아버지는 상환냥을 안고 논을 샀습니다. 그러니까 논이 쌌어요 상환냥을 내야 하니까. 상환냥을 다 내야 내 앞으로 등기는 낼 수 있어요. 우리는 자작논이 7~800평뿐이었는데 상환냥 내고 3필지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두 차례에 걸쳐 농지개혁이 이루어졌다. 1차는 미군정 시기인 1948년에 단행되었다. 이때는 일본인이 지주였던 농지를 대상으로 시행하였다. 일본인 지주 농지는 해방 후 신한공사로 귀속되었는데, 소위 ‘귀속농지’가 1차 농지개혁의 대상이었다. 유상매수 유상분배를 토대로 이루어졌다. 귀속농지의 지가는 연간생산량의 3배로 규정하였으며, 상환기간은 15년이었다. 이때 한국인 지주들의 반대가 심하여 귀속농지만 대상으로 농지개혁이 이루어졌다.

2차 농지개혁은 1950년에 시행되었다. 이때는 한국인 지주들이 소유한 농지를 대상으로 하였다. 매수한 농지의 지가, 곧 농민이 상환해야 할 보상액의 평가는 해당 농지 주생산물의 평년작의 1.5배로 정하였다. 지가상환은 원칙적으로 5년간 균분연부(均分年賦)로 할 것이나 일시불이나 상환기간 연장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지주들은 농지개혁 시기를 전후한 때의 혼란과 입법 시작부터 개혁 착수까지의 경과된 기간 및 관계 법규 등의 허점들을 교묘히 악용하였다. 법제정 이전에 일부 농지는 농지개혁에 따른 조건보다는 높은 값으로 소작인에게 양도되었다. 또 분배농지를 임의처분 또는 은닉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농지개혁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 대상농지의 절반 수준에 머물렀다.

‘상환냥’이라 이때 정부에 내는 ‘지가상환’을 말한다. 정관옥의 부친이 ‘상환냥’을 내고 자가농지를 마련했다면 2차 농지개혁 대상농지를 말한다. 다만 농지개혁 시행 직후에 전쟁이 발발하는 등 정세혼란으로 인해, 전쟁 뒤에는 일시불로 상환냥을 변제할 수 있게 하였고, 심한 경우에는 ‘흐지부지 되었다’는 증언도 존재한다.

 

 

김성식 박사(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 특별연구원)

 

 

주석)

1)정관옥(80세, 1942년생). 어전리 마을사 조사의 주요 제보자이다. 그는 2001년부터 2019년까지 마을 이장을 역임하였다. 또 농어촌공사와 계약해 6개월 동안은 ‘어전양수장’ 관리인이 된다. 어전리에 첫 입향은 부친 때라고 한다. 동산촌에 살던 부친이 결혼해 어전리로 분가하였고, 정관옥은 어전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이 마을로 들어온 것도 어전리 거부 ‘都氏’와 관련이 있다. 애초에는 어머니의 고모가 도씨 집안으로 시집을 왔으며, 그 고모의 권유로 부친이 이 마을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2)전북농지개량조합, 『전북농조80년사』, 562쪽, 198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