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천수와 조수의 조우(遭遇) 현장, 해전(海田) 마을사 (2)

4. 뒷냇갈이라고 부른 대간선 분기수로
5. 일제강점기 때 실시한 해전뜰 경지정리사업
6. 만경강 모래찜 명소

4. 뒷냇갈이라고 부른 대간선 분기수로

 

해전 취락지는 제방과 120미터쯤 떨어져 있다. 이 구간이 지금은 논으로 말끔히 개간되어 있지만 과거에는 대부분 ‘앞냇갈’이라고 부르는 하천부지였고, 밭을 일구거나 과수원을 하던 전작지대였다. 그러면 ‘뒷냇갈’은 어디를 말하는가. 후정리를 지나는 대간선수로에서 분기한 수로를 말한다. 이에 대해서도 이석룡의 진술을 참고하기로 한다.

 

“뒷냇갈은 대간선 물이에요. 비비정에서 철로 지나가는 길 밑으로 ‘땅수문’을 파가지고 한내 물을 대간선에 공급해요. 한내다리에서 보면 수문 여러 개가 보이잖아요? 거기에서 물을 취수해서 대간선으로 보내요. 지금은 그 수문을 닫아버렸어요. 삼례 대명아파트 뒤로 복개도로가 대간선 줄기인데, 후정리 제수문 앞에서 우리 동네로 오는 수로가 나뉘어요. 그 물을 받아서 우리 동네 뒷개울로 들어와요.”

 

이석룡의 설명을 종합하면 이렇다. 대간선수로는 고산면 어우리보 취수구에서 시작하여 봉동 구미리를 지나 석전리로 향하고, 신금리와 삼례 마천을 지나 춘포 봉개 쪽으로 나간다. 삼례는 대간선수로에 물을 재공급하는 곳이다. 만경강 물을 대간선수로에 보충하는 것이다. 그곳이 한내다리 아래 설치된 한내보, 제수문, 취수구이다. 한내보에서 취수한 강물을 대간선에 공급하기 위해서 새롭게 만든 수로가 비비정 터널(隧道)이다. 현재는 수문을 닫아 사용하지 않고 있다. 만경강이 오염될 당시에 내린 조치였다. 이 물과 대간선이 합수되는 곳이 후정리 수로이다. 여기에서 수로 하나를 분기시켜 해전리 농업용수를 공급는 것인데, 이 수로가 해전리의 뒷냇갈의 원천이다. 한때는 이 마을의 식수이기도 했다.

삼례 후정리 제수문은 수로 삼거리이다. 마천을 건너온 대간선수로, 비비정 터널을 건너온 재공급 수로, 해전마을로 출발하는 분기수로가 그것이다. 해전으로 들어오는 수로는 해전을 거쳐 춘포로 향한다.

그런데 해전리 앞냇갈과 뒷냇갈 조성 시기는 다르다. 앞냇갈은 오랜 시기 존재했던 것 같다. 주지하듯이 만경강은 하도의 곡류(曲流)가 심한 사행천이다. 조수(潮水)가 밀려오면서 마치 바다의 갯골을 형성한 것과 같다. 그래서 삼례 이하 만경강 하천수를 농업용수로 사용할 수가 없었다. 삼례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만경강 본류가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하거니와 강의 우안 쪽에서는 강물을 직접 용수로 활용할 수 있는 마지막 구간이기 때문이다. 조수의 영향을 받는 끝지점이 삼례이고, 그 아래로는 농업용수를 직접 취수하는 곳이 없었다. 심지어 옥구저수지도 만경강에서 직접 취수하지 않고 대간선수로의 종말지점으로 설계하여 축조하였다.

현대에 와서는 1970년에 농지개량조합이 김제시 백구면 백구정 앞에서 만경강을 가로지르는 보와 제수문을 설치하였다. 이로써 조수를 차단하였고, 그 이후부터 삼례에서 백구정 구간까지의 강물을 농업용수로 활용할 수 있었다.

해전리에 앞냇갈이 형성된 것은 제방이 없던 시기, 만경강이 여러 지류로 형성되었던 구조와 무관치 않다. 이를 세천(細川)이라고 한다. 앞냇갈을 이룬 하천수의 유입은 비비정을 돌아나오면서 본류와 갈라져 형성된 세천으로 판단된다. 이는 “어른들 말로는 앞냇갈이 큰 또랑이었다, 고산천 흐르는 물이 앞또랑으로 많이 들어왔다. 앞냇갈에서 빨래하고 김장하고 고기잡고 그랬다.”는 이석룡의 진술과도 부합된다.

 

“비비정 앞에, 철교 밑으로는 제방 쌓고 그 앞에 돌을 몽땅 갔다 쌓아놨어요. 물이 때려도 팽기지 않게. 우리동네 사람들이 집 지을라면 밤에 몰래 가서 그 돌을 실어다가 주춧돌 놓고 그랬어요. 거기가 물이 뺑 돌아가는 디라 깊어요. 그런게 제방이 팽겨나가지 마라고.”

 

대간선수로도 애초에 없던 수로를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기존에 우동천, 우산천, 삼례천 등 자연하천으로 흐르던 수로를 적절한 규모와 방향으로 인공을 가한 것이다.

뒷냇갈은 흔히 ‘대똘’이나 ‘큰또랑’으로 부르는 용수로이다. 이 수로 공사는 최초로 전익수리조합의 주도 하에 추진되었다. 전익수리조합은 대간선수로가 시작되는 고산 어우리 취입구에서 취수키 위해 1910년 2월에 공사를 착수하여 1911년 5월에 준공한다. 비비정 아래 터널 수로공사도 이때 이루어진다. 이어서 두 번째 수리사업이 1920년대 초의 만경강개수공사이다. 이때는 대아리저수지를 신설하면서 기존의 수로나 터널 등을 확장 또는 신설하는 수로공사를 수행한다. 그러니까 1910년에 시작한 대간선수로와 관련된 것이 뒷냇갈이다. 대간선에서 한 수로를 분기 신설해 해전리로 용수를 공급한 것이고, 뒷냇갈 역사의 시작인 셈이다.

 

 

 

5. 일제강점기 때 실시한 해전뜰 경지정리사업

 

해전뜰 농경지는 필지당 1200평씩 경지정리가 반듯하게 되어 있다. 경지정리사업이 어느 시기에 이루어진 걸까. 고령의 주민들은 본인이 어렸을 때부터 본 모습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경지정리가 된 것이다.

 

 

삼례평야 일대가 일본인 지주들에 잠식되었던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농업정책 중 토지개량사업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여준다. 첫째, 토지개량사업은 수리조합을 중심으로 총독부의 강력한 지원을 받아 추진되었다. 둘째, 토지개량사업은 일제 본국의 식량문제 해결을 위한 미곡증산계획에 따라 장기간 계획적·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셋째, 토지개량사업의 중점은 여전히 농업용수 개발과 농지조성에 두어졌지만 1940년 증미계획에 의해 경지정리사업이 최초로 실시되었다. 넷째, 토지개량사업의 목적은 미곡증산이었지만 증산량보다 많은 양의 미곡을 일본으로 이출하여 미곡증산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식량난이 가중되었다.

경지정리사업이 공식적으로는 1940년에 최초 실시되었다고 한다. 물론 바다를 간척해 조성한 대규모 농경지는 애초부터 경지정리가 된다. 만경강에 근대식 제방이 축조되기 전 삼례평야 일대는 농경지 이외에 하천부지나 황무지 땅들도 많았을 것이다. 이런 지역은 상습적인 침수나 한해에 취약하기 때문에 버려진 땅이나 다름없었다. 또는 곳곳에 물웅덩이가 있어서 농사짓기에는 용이하였으나 그만큼 농지가 늘지 못하기도 하였다. 이후 보나 제언을 쌓는 등 수리기술이 진전되며서 황무지나 하천부지, 소류지 등이 차차 개간되어 농지가 되어갔을 것이다. 이렇게 오랜 시차를 두고 조성된 농지는 규격도 농로도 수로도 갖춰졌을 리 없다. 천수답지역의 농경지와 다름없다. 삼례지역에는 현재도 하리, 구와리, 신탁리 등 경지정리를 하지 않은 지역도 상당히 존재한다. 이런 지역은 그럴 만한 주민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아무튼 해전리는 일제강점기 때 이미 경지정리가 끝난 삼례의 핵심 평야지역이다. 해전리에서 볼 때 당시 경지정리가 완성된 곳은 삼례 후정리 철로을 기준으로 서쪽지역, 또 대간선수로 남쪽지역이었다. 여타 지역이 지금처럼 경지정리를 한 것은 1970년대 이후의 일이다.

해전리도 상습 침수지역이었다. 대부분의 삼례땅이 그렇듯이 지대가 낮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제강점기부터는 근대식 신제방, 대간선수로, 철로 등이 설치되면서 빗물의 흐름과 배수를 차단하는 역할을 하는 바람에 더 잦은 침수를 초래하였다. 농사짓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해전리에 단 하나의 걱정거리가 침수였다. 이 문제가 원천적으로 해소된 때가 1999년, 해전배수장 설치 이후이다.

 

 

6. 만경강 모래찜 명소

 

오른쪽 신문기사는 일본어로 발행한 <부산일보> 1933년 기사이다.

발행일이 양력 5월 25일이니 단오를 3일 앞두고 쓴 기사로, 철도국에서 단오절을 기하여 기차요금 할인행사를 한다는 내용이다. 그만큼 만경강에서의 모래찜이 단오절 세시풍속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만경강변 모래찜(沙浴)에 할인열차 운행”

철도국 대전사무소에서는, 음력 5월 5일(오는 28일)은 예로부터 만경강변의 모리찜질이 만병에 영험하다고 하여 전북부선 대장역 부근으로 매년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큰 모래찜질장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당일 호남선 함열, 김제, 군산 간 각 역부터 대장역 간 세 역(驛)에 20퍼센트 할인, 또 이리역에서 대장으로의 왕복은 20퍼센트 할인으로 차표를 발매하여 편의를 제공한다고 함.

 

우리 사회에 찜질방 목욕문화가 1994년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찜질방은 삽시간에 전국화되었다. 우리는 뜨거운 것에 ‘지지면’ 효과가 있다는 관습을 오랫동안 유지해 왔다. 오늘날 개념으로 보면 물리치료에 대한 집단지성이 축적된 것이다.

해전은 아랫마을 사천(沙川)과 함께 모래찜의 명소였다. 모래톱이 형성되면서 모래찜도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무의미할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닐 수도 있다. 이곳은 적어도 1960년대까지는 내륙의 해수욕장 못지 않은 유원지였다. 멀리서 오는 사람들은 삼례역과 춘포역을 이용하였다. 4월 초파일, 4월 스무날, 5월 단오 때는 역전 대합실이 터져나갈 지경이었다. 만경강에서 모래찜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삼례에서는 해전이고, 춘포에서는 사천과 판문(늘문)이다. 사천과 판문은 뻘이 섞이는 곳이라 모래밭은 삼례가 더 크고 양질이었다.

 

“우리 동네는 만경강 제방 너머에 밭이 있고, 밭 끝에서부터 모래밭이 쌓여있고, 그 끝에 물줄기가 흘러요. 모래가 엄청 많아요. 모래밭에서 동네 대항 축구도 하고 그랬어요. 해수욕장이나 한가지에요. 사람이 누울 정도로 모래를 파고 들어가 누우면 목만 내놓고 묻어줘요. 모래가 뜨거우니까 뜨뜻한 기운이 올라와요. 땀을 쫙 빼고 나와요. 밀물이 들어올 때는 짠물이 되어요. 그래서 해수찜이 된다고 해요.

익산, 전주에서 오는 사람들이 인산인해였어요. 여름이면 옷이 하얗잖아요. 만경강이 하얀할 정도에요. 왼 식구들이 솥단지, 장작, 미역, 부식을 짊어지고 삼례역부터 걸어서 와요.”

 

모래찜 인파가 성황일 때는 장사꾼들도 몰려와 북새통을 이룬다. 밥장사, 술장사들이다. 강변부지 허허벌판에 천막치고 장사하는 노상주점, 좌판 깔고 장사하는 잡상인 등의 북새통은 5일장을 방불케 했다. 근동의 청소년들도 장사에 눈을 떠 한 몫 챙긴다. 모래찜 ‘구데기’(자리)를 만들어 팔기도 하고 ‘삼례약대’에서 만든 ‘아이스케끼’도 팔았다. 해전마을 주민들이 가장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키워드가 ‘모래찜’일 정도로 저마다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사월 초파일과 오월 단오는 세시풍속일이라 쉽게 짐작할 수 있지만 4월 20일은 무슨 날인가? 씻나락 담근다는 ‘곡우’이다. 농사력으로는 못자리를 준비하는 시기이다. 본격적인 농사철로 접어드는 것이다. 농사를 앞두고 모래찜으로 육체적인 땀도 빼고, 정서적인 기분전환도 할 만한 날이다. 농촌에서 5월 단오절은 모심는 이앙기와 겹친다. 따라서 근동의 농촌에서는 시절놀이를 앞당겨 4월 20일에 모래찜질로 하는 것이다.

 

 

그러던 모래찜도 만경강에서 모래가 소멸되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시기는 대략 1970년대 초반이었다. 만경강 골재채취가 1960년대도 없지는 않았지만 소규모에 불과했다. 수요도 한정적인 데다가 중장비도 없던 시절이라 반출도 제한적이었다. 그때는 다 무단반출이었다.

1970년대는 상황이 달라진다. 하천 골재채취와 반출이 허가를 받아야 가능해졌다. 이 말은 허가만 받으면 누구나 골재채취가 가능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게다가 1970년대는 산업화가 본격화되던 시절이다. 중장비도 날로 대형화되어갔다. 각지에 공단이 들어서거나 도로공사, 주택공사, 아파트공사 등 건설, 건축 붐이 일어난 시기이다.

고산천 어우리에서부터 봉동 고천리까지 구간의 자갈모래는 1970년에 1차로 개통한 전주-대전간 호남고속도로 건설현장으로 다 들어갔다. 시행사가 현대건설이었다. 하천의 골재를 2미터 이상 깊이로 채취했다고 한다. 덕분에 고산천에서는 홍수시에도 범람의 위험이 사라져 버렸다. 그 전에는 하상이 그만큼 높았기 때문에 어지간한 비만 와도 봉동은 초비상이었다. 범람 위험이 있으면 제방에서 징을 치거나 지서에서 ‘오포’(사이렌)를 불어 비상상황임을 알려야 했다.

모래찜이 최종 중단된 또 다른 원인이 있다. 김제 백구면 이띠기와 백구정을 잇는 ‘만경강제수문’을 설치해 바닷물 조수를 차단한 탓이다. 이때가 정확히 1970년이다. 만경강을 횡으로 가로막고 제수문을 설치해 조수를 차단한 까닭은 김제 백구면, 청하면 등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또 익산공업단지(특히 쌍방울)에 공업용수를 공급한다는 명분이었다. 조수가 차단되자 ‘해수찜’ 효과도 사라지고 더 이상 모래톱도 형성되지 못하였다.

 

“전북농조에서 만경강을 막아버리니까 바닷물이 못 올라오게 되고, 그때부터 모래찜이 없어졌을 거요. 그리고 건축이 활성화되면서 그 모래를 골재로 다 파갔어요. 새마을운동이 벌어졌을 때 모래를 거기에서 퍼다가 벽돌 찍어서 담쌓고, 창고 짓고, 집 짓고 그랬어요. 새마을운동 때만 해도 골재업자들이 모래를 파먹고 있었지만 많이 남아있을 때요.”

 

 

김성식 박사(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 특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