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명사] 1. 가사에 곡조를 붙여 목소리로 부를 수 있게 만든 음악. 또는 그 음악을 목소리로 부름. 2. 가곡, 가사, 시조 따위와 같이 운율이 있는 언어로 사상과 감정을 표현함. 또는 그런 예술 작품. 비가 왔었다. 아니 비가 안 왔었다. 아니다 비가 온 것 같기도 하고 비가 안 온 것 같기도 하다. 중3에서 고1로 올라갈 즈음이었고 나는 그 해 고입고사를 봤다. 시험을 앞둔 아침, 지금은 노모가 된 엄마와 한바탕 전쟁을 치렀다. 그리고 학교에 입장해 또 한 번의 전쟁을 치렀다. 시험이 끝나고 발걸음은 무거웠고 왁자지껄한 친구들과 달리 나는 얼굴이 굳어있었다. 지금은 이유도 떠오르지 않지만, 어머님께 미안함이 앞섰고 시험을 앞두고 괜한 오기를 부렸나 싶은 후회를 했던 것 같다. 느릿느릿 학교 정문을 나서자 누나가 서 있었다. 누이는 고맙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앞서 걸었다. 누이의 발걸음을 따라가다 보니 익산역 앞, 새서울악기사였다. 누이는 고2였고 나는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사춘기 소년이었다. 중3였던 나는 음악을 몰랐다. 라디오조차 들을 줄 몰랐다. 그런 내게 누이는 수많은 카세트테이프와 LP판 앞으로 이끌었고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이완용 인명 조선 고종 때의 친일파(1858~1926). 자는 경덕(敬德). 호는 일당(一堂). 1910년에 총리대신으로 정부의 전권 위원이 되어 한일 병합조약을 체결하는 등 민족을 반역하였으며, 일본 정부로부터 백작(伯爵)을 받고 조선 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지냈다. 몇 해 전, 방영된 TV프로그램이 불현 듯 떠올랐다. 아나운서는 도심 속 청춘들에게 다양한 인물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누군가?’라며 물었고, 그에 대한 대답을 간단히 인터뷰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그 인물 속에는 연예인, 운동선수, 현직 정치인, 항일 의사 등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오래된 흑백사진 한 장과 함께 ‘이완용’이란 팻말이 의미심장하게 제시되었다. “한 번도 안 들어봤어요. 의사였나?”/ “정치인?”/ “마음이 부드럽고 착한 사람?”/ “음, 무얼 팔았는데 무엇을 팔았던 사람인데…”/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던 사람이지 않았을까요?” 경술국치 [庚戌國恥] : 한일병합(韓日倂合)을 경술년에 당(當)한 나라의 수치(羞恥)라는 뜻으로 일컫는 말.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사이에 맺어진 합병조약은 대한제국의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형식적인 회의
독재 민주적인 절차를 부정하고 통치자의 독단으로 행하는 정치. 고대 로마의 체제, 독일의 나치즘, 이탈리아의 파시즘, 일본의 군국주의 따위가 그 전형이다. 독재자는 견제 받지 않는 절대 권력을 가진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를 의미한다. 보통 총리, 당수, 군 최고사령관, 주석 같은 칭호를 달고 있으며 대통령이라는 칭호를 다는 경우도 있다. 또한 모든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하는 경향의 사람을 빗대어 일컫기도 한다. 원래의 뜻은 ‘홀로(獨) 재단(裁)하는 자(者)’라는 뜻이다. 옷감을 자기 멋대로 가위질 하는 사람. 여기서 ‘재단하다’는 ‘옳고 그름을 가르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서슬 퍼런 가윗날로 스스로 옳고 그름을 가르는 자. 아니 어쩌면 가윗날을 쥔 당신의 손을 내가 마음대로 휘두르는. 어느 날 불쑥, 독재자는 나타나게 마련이다. 항거할 틈도 주지 않은 채 벚꽃잎 같은 화사함과 달콤함으로 또는 자신의 개성을 바탕으로 이상적 세계관이나 사고관 혹은 그만의 독특함으로. 한번 들어앉은 이 몰상식한 독재자는 항거하면 항거할수록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거나 내가 패배할 수밖에 없는 감정선을 만든다. 이 독재로 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스스로 피지배자가 되어 종속
물메기 물메기 [명사] 꼼칫과의 바닷물고기. 메기와 비슷하며, 반투명하고 연한 푸른 갈색 바탕에 그물 모양의 얼룩무늬가 있다. 배와 등이 지느러미로 둘려 있다. 한국 동해, 일본 등지에 분포한다. 나는 초겨울 혹은 겨울 하면 생생히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어스름이 질 무렵, 어머니께서 노을을 등지고 걸어오시는 모습. 한 손에는 보험 가방과 다른 손에는 생선 두어 마리를 들고 오시던 초겨울의 풍경이 지금도 생생하다. 엄마를 외치며 엄마 품으로 달려가면 손에 든 생선이 아들의 옷이라도 스칠까봐 조심히 안아주던 어머니의 시리면서 따뜻했던 품. 어머니를 따라 집에 들어와서 보니 그 생선은 주둥이가 크고 몸집도 일반 생선의 2~3배 정도는 큰, 아주 못 생기고 징그러운 생선이었다. 입은 터무니없이 크고 넓었으며 몸통은 흐물흐물한 것이 꼭, 물 많이 먹은 밀가루 반죽처럼 손으로 떼어내면 쉽게 떼어질 것 같았던 못난 생선. 어머니는 물메기라고 하셨다. 커다란 주둥이에 노끈이 꾄 채 두 마리가 바가지에 누워 있었고, 두 살 터울인 누이와 나는 서로를 닮았다고 놀려대며 퇴근한 어머니의 주위를 맴돌았었다. 저녁 밥상 위에 물메기탕이 올라오자 나는 숟가락으로 덥석 살점을 떠서
폭폭하다: 몹시 상하거나 불끈불끈 화가 치미는 듯하다. 전북 지방의 방언이다. 대학교를 졸업하기 전 나는 서울로 취직했다. 지방대 졸업예정자가 서울로 취직했으니 누구는 거창한 미래를 그렸고 IMF 때였으므로 누구는 지독한 질투를 하기도 했다. 거창한 곳도 아니었다. 작은 잡지사 취재기자였을 뿐. 물론 수습 3개월이란 꼬리표가 붙어있었다. 서울살이라고는 1년 남짓 재수 시절과 방학 때 아주 가아끔 상경했던 것이 전부였으니 나는 여전히 촌놈이었다. “허허, 사투리가 구수하고만”, ‘누가? 내가?’ 가끔 들려오는 말이었지만 나는 애써 내가 아니라고 최면 아닌 최면을 걸었다. 나는 표준어만 구사하는 거라고. 입사 후 첫 회식, 왁자지껄한 연탄구이집에서 껍데기와 갈매기살이 먹음직스럽게 불판을 오르내렸고 연거푸 따라주는 술잔을 넙죽넙죽 잘 받아넘겼다. 주위 소음 때문에 목소리는 자꾸 올라가고 나는 편집장과 선배 기자들에게 이쁨 아닌 이쁨을 떨었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툭툭 두드리는 것 아닌가. 뒤돌아보자 초면인 사내가, 나보다 5~6살 위쯤 보이는 사내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고향이 어디세요?”, “저요? 고향은 군산인데 자란 곳은 익산이에요.” 대답을 듣
봄맞이 [명사] 1. 봄을 맞는 일. 또는 봄을 맞아서 베푸는 놀이. 원숭이 똥구멍은 빨개, 빨개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빠나나 빠나나는 길어, 길으면 기차 대여섯 살의 나는 어디서 배웠는지 원숭이 똥꾸멍 노래를 잘 따라 불렀었지. 똥꾸멍을 똥꾸녁이라 했던가? 아니면 빨개를 빨가라고 했었던가? 그러고 보면 기억은 늘 쉽게 변질된다. 옛 기억들이 내 몸에 맞게 체형을 바꾸거나 답답한 생활 속에서 왜곡되는 일들은 얼마나 많은가. 역사(驛舍)만 남은 춘포역으로 향한다. 봄춘(春)에 개 포(浦), 우리말로 하면 봄개고, 봄나루인 춘포. 봄개, 봄나루 얼마나 예쁜 이름이던가. 지독한 한파에서 벗어나 봄을 맞기에 이만한 지명이 또 있을까? 사랑하는 당신이 있다면 당신을 봄나루라 부르고 싶은. 나를 놓고 떠나는 111번 버스가 날린 먼지가 채 가라앉기도 전 춘포면내를 둘러본다. 60년대 혹은 70년대가 고스란히 앉아있는 듯한 풍광. 웅크린 어깨를 가진 단층 건물들과 낡은 입간판들이 나를 순식간에 아날로그 세상으로 옮겨놓았다. 짧은 여행은 시공간을 넘나든다. 춘포역으로 향하는 골목으로 들어서자 패망한 일본인들이 남겨놓은 듯한 적산가옥들이 눈에 띄었다.
가방 [명사] 물건을 넣어 들거나 메고 다닐 수 있게 만든 용구. 가죽이나 천, 비닐 따위로 만든다. 어머니의 커다란 가방은 콜드크림, 양담배, 파인애플 깡통을 비롯해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물건들로 가득했다. 그 무겁고 무거운 가방에 내 손 하나가 더 매달려 있었다. 미제 물건과 어린 아들을 담은 가방. 버스 차비가 아까웠던 어머니는 길고 긴 길을 무거운 가방을 들고 걸어 다니셨다. 힘들어도 혹은 어린 아들이 떼를 써도 삶의 무게 때문이었는지 어머니는 ‘무겁다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으셨다. 그래도 장사가 잘된 날이면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파인애플 깡통을 까주셨다. 가방엔 맛있는 파인애플이 살고 있다고 믿었다. 가방에 대한 첫 기억. 기억 속 두 번째 가방 역시 어머니 가방이다. 까만 가죽을 뒤집어쓴 가방 속엔 화창한 웃음이 새겨진 안내 책자들이 수북했다. 행복설계, 은퇴 설계, 건강 설계 등. 수많은 보험 안내 책자 속에는 왜 그리 웃는 사람들이 많았던지. 보험 안내 책자로 딱지를 접을 때마다 웃는 사람들의 고른 이빨이 딱지 앞에 나오도록 접었다. 가죽 가방 속엔 행복한 웃음이 살았으므로 나도, 어머니도 행복한 척해야 했다. 어머니의 까만 인조가죽 가방은
덩치 -몸의 부피 고백하건대 10여 년 동안 앞만 보고 살았다. 모두 그 녀석 탓이다. 그 녀석과 헤어지고 나는 한참 동안 우울했다. 앞만 보고 살았는데 갑자기 앞이 사라졌다는 상실감. 내 곁에서 사라진 녀석 때문에 나는 투덜거림을 앞세웠고 불평불만을 입에 달고 살았다. 다시 녀석과 비슷한 녀석을 만나야겠다는 욕심에 이곳저곳을 기웃거렸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녀석과 비슷한 녀석에 대해 수소문했다. 그사이 봄이 왔다. 앞이 사라졌다는 상실이었을까? 아니면 녀석과 헤어진 불편함이었을까? 나는 봄을 외면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앞을 잃었다고 믿었고 여전히 앞만 보았다. 나는 영악하므로 잃은 것을 잃지 않았다고 최면을 걸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그를 만났다. 녀석과는 다른 덩치가 큰. 전주 근교에 위치한 완주군 삼례읍이었다. 모 대학 한국어교사로 있던 나는 일을 마치고 일찍 버스에 올랐다. 삼례발 익산행 좌석버스 111번. 자리에 앉아 시집을 꺼내 읽다가 무심결에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 바라본 것이 아니라 훔쳐보았다. 파랗게 올라오는 보릿대의 싱그러움을, 보릿대 잎사귀 사이사이 뛰노는 봄의 기운을. 그러다 덜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