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마다 한 번쯤은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 같은 장소라도 계절 변화에 따라 분위기가 다르기 때문에 새로운 느낌이 들기도 하고, 계절 따라 달라지는 모습도 비교해 보고 싶어서다. 대아저수지도 그중 한 곳이다. 대아저수지를 탐하는 방법은 여럿 있다. 차를 타고 드라이브하는 방법도 있고, 전망대에 올라 감상하기도 한다. 최근에 위쪽에 있는 동상저수지 가는 방향 도로 중간에 또 하나의 전망대가 생겨 이쪽 저쪽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저수지 가까이 다가가서 보고 싶을 때는 대아저수지 안에 있는 전주 최씨 묘역이 좋다. 거침없이 탁 트여 있어 대아저수지 풍경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곳으로는 운암산과 대아수목원 뒷산이 제격이다. 두 곳 중에서 개인적으로는 대아수목원 뒷산 전망대를 선호한다. 대아수목원은 분재원과 열대식물원, 정원이 아름답게 가꾸어져 있어 언제 찾아도 꽃과 나무를 감상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따뜻한 봄날 금낭화꽃도 보고, 대아저수지 봄 풍경을 탐하기 위해 대아수목원을 찾았다. 대아수목원은 입구부터 진한 봄 향기를 뿌린다. 벚나무의 푸르름과 철쭉꽃 붉은빛이 잘 어울린다. 이 시기 대아수목원은 입구부터 정원 주변까지 온
<필자 소개> 안녕하세요. "완주불교기행"을 연재하게 된 이준호입니다. 저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완주가 고향인 아버지를 따라 10살 때 완주로 이사와 지금까지 살고 있으며, 2020년도에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전북지부장을 역임하였습니다. 제 고향이자 조상 대대로 살던 곳인 완주 지역의 전통불교문화를 소개하고자 2022년 5월부터 "삼례사람들"지에 "완주불교기행"을 기고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완주의 다양한 불교 이야기를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중태기라고 부르는 민물고기가 있다. 이걸 서울 사람들은 버들치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중태기는 주로 맑은 물에 살며 크기는 조그마해 주로 매운탕거리로 많이 해 먹는다. 중태기라는 이름은 “중이 태기(胎氣: 임신)한 물고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스님이 물고기를 임신하다니, 참 신묘한 일이다. 하여튼 그 중태기의 ‘중’이 누구냐면 석가모니의 소화신(小化身)이라 불렸던 진묵대사(震黙大師)다. 정확히는 진묵대사가 먹은 물고기가 바로 중태기인데, 이것이 뱃속에서 똥으로 나온 게 아니라 물고기가 산 채로 팔딱이며 튀어나온 데서 유래했다. 진묵대사가 하루는 절을 떠나 탁발하러 냇가 근처를 지
흩날리던 벚꽃은 지고 싱그러운 초록 잎이 우리를 반기는 5월입니다. 세 번째 인터뷰는 완충지대에서 연극모임 ‘인생각본’ 이끄미로 활동하는 이종화 님을 만나 요즘 사는 이야기에 대해서 들어보았습니다. 완충지대는 삼례를 거점으로 청년 활동과 그들의 커뮤니티를 지원하는 공간입니다. ⦁당신을 소개해주세요. 삼례 사는 이종화입니다. 연기를 전업으로 하는 12년 차 연극인이에요. 창작극회에 소속되어 단원들과 함께 연극을 무대에 올리고 있고요. 주특기가 연극이다 보니 사람들과 삼례에서 연극 모임도 해요. ⦁지금까지 어떤 활동을 해 오셨나요? 대학 때 전공은 토목공학과였어요. 성격도 내성적이어서 주변 사람들은 제가 연극인이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거에요. 군대를 다녀온 뒤 미래에 어떤 일을 할까 고민이 되던 차에 제가 연기를 좋아하던 게 생각났죠. 어떤 경로로 배우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마침 대학교 동아리 모집 시즌이어서 연극동아리에 들어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족보가 꼬인다고 받아주지 않더라고요.(웃음) 다니던 대학교에 평생담당교수제가 있었는데 교수님께 조언을 구해보았죠. 그분의 소개와 연결로 우연찮게 창작극회에 첫발을 들였어요. 배우들의 현장감 있는 연기를 보면서
기억 1. 과거의 사물에 대한 것이나 지식 따위를 머릿속에 새겨 두어 보존하거나 되살려 생각해 냄 2. 머릿속에 새겨 두어 보존되거나 되살려 생각해 내어지다. 기억은 쉽게 변질된다. 체형에 맞춘 옷처럼 나에게 맞게 변형된 채 기억은 저장되는 법. 누군가와 기억을 맞추는 날이면 ‘그랬던가?’라는 의문에 우리는 쉽게 노출되지 않던가. 또한 비슷한 상황과 상황이 기억 속에서는 쉽게 버무려진다. 맞다고 자신했던 기억이 다른 상황과 겹쳐지며 엉뚱한 기억으로 나를 인도하기도 한다. 어쩌면 내가 당신을 기억하는 방법 또한 변질과 변형과 버무려짐이지 않을까? 내가 나의 기억 속 당신을 나의 바람대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현듯 이러한 의문이 들기 시작하자 기억 속 모든 것들에 대한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만난 사람, 내가 겪은 일, 내가 처했던 상황, 상황, 상황들. 기억들을 꺼내어 나열하면 좋은 기억들이 지천이다. 물론 나쁜 기억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열된 기억들을 집어 올리면 웬만해서는 좋은 기억 아니던가. 당신과 나는 좋은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쁜 기억은 행방불명이 되었거나 회신 없는 편지 같다. 아마 당신은 나에게 눈을 흘기기도 했고 때로는
3. 비비정 주민들의 애환, 역경의 세월 1) 강변 하천부지 경작과 정부의 회수조치 이들의 삶은 가파른 벼랑 끝이었다. 남자들은 자포자기한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단명한 남자들이 많았다. 지금 비비정 마을에 고령의 여성들이 주류를 이룬 원인과도 무관하지 않다. 농지가 없는 주민들의 생계수단은 만경강뿐이었다. 이들은 제방 안쪽의 하천부지를 개간하여 밭을 일구었다. 밭에는 호밀, 밀, 서숙(조) 등 곡물이 되는 작물을 경작하였다. 만경강은 중하류로 갈수록 바닷물 왕래로 갯펄이 퇴적되면서 간석지가 넓게 형성된다. 이런 곳에는 주로 나문재, 갯갈대, 함초 등 염생식물이 산다. 일제강점기 때는 강 하구 쪽을 대규모로 간척하였다. 해방 후에는 만경강 중류 지역에서 간석지를 개간하여 논으로 만든 곳이 많았다. 주로 개인적으로 일명 ‘땅뙤기’라고 하는, 삽 한 자루로 제방을 쌓아 논을 만들었다. 일부 업자들은 장비를 투입하여 꽤 큰 규모도 조성하여 불하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조성한 소규모 간척지는 사인 간에 매매도 이루어졌다. 하천부지임에도 이런 방식으로 경작지를 늘려나간 사례가 많았다. 만경강에서는 주로 김제시 백구면, 청하면, 만경면, 옥구군 대야면 등이 그랬다.
곳곳에서 꽃 소식이 전해지고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이 마을을 설레게 한다. 어딘가로 떠나도 좋을 분위기이다. 요즘은 아무래도 비대면으로 활동할 수 있는 곳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생각한 곳이 소양면에 있는 소양문화생태숲이다. 조용히 산책을 하면서 오롯이 봄의 향기를 느껴보고 싶었다. 제방 위에 심어진 오성제 소나무 소양면 소재지에서 송광사를 지나 위봉산성 방향으로 가다 보면 오성한옥마을이 나온다. 소양문화생태숲은 오성한옥마을 오성제 주변에 조성되었다. 종남산(608.3m)에서 흘러내려온 산자락의 자연스러움과 인공 조림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숲이다. 오성한옥마을 이름은 오성제 주변의 오도재(五道峙) 마을과 위봉산성 아래 계곡을 따라 들어선 외성리(外城里)마을이 합해지면서 마을 이름 한자씩을 따서 지었다. 마을 입구에 보이는 마을이 옛 외성마을이고, 왼쪽으로 들어가면 오성제가 나오는데 오성제 주변 마을이 옛 오도재마을이다. 소양문화생태숲 걷기는 오성제 제방 입구에서 시작된다. 제방에 들어서면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저수지 제방과 나무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나무뿌리를 통해 저수지 물이 빠져나갈 위험성이 있어 저수지 제방에 나무를 심는 것은 피
1. 비비정 야산이 ‘수도산’인 내력 고산천, 소양천, 전주천이 합류하여 비로소 강다운 강을 이루는 곳, 삼례 비비정 마을이다. 만경강 본류가 시작되는 지점에 비비정 마을이 있고, 풍광이 빼어난 정자(亭子) 비비정(飛飛亭)이 있다. 비비정 마을과 정자 비비정은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전형답다. 산다운 산이 전무한 삼례땅에 배산임수라니? 삼례에는 ‘수도산’이 있다. 사실 이렇다 할 이름조차 없던 구릉성 산지, 기껏해야 해발 30미터쯤 될까? 이 산을 삼례 사람들은 ‘수도산’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일제강점기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묘하다. 이 산에서는 두 가지 공사가 벌어졌는데 공교롭게도 두 사업명 모두 ‘수도’가 들어간 사업이다. 그 중 한가지는 수도(水道)사업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상수도사업이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 혹은 1922년, 당시 이리(裡里)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상수도가 필요했다. 익산지역은 예나 지금이나 별다른 수원이 없어서 식수문제가 늘 현안이 되는 도시이다. 근래까지도 익산지역 주민들은 고산 어우리 취수구에서부터 시작되는 대간선도수로, 즉 농업용수를 정화해 식수로 사용해왔다. 일본인들은 특별한 상수도를 개발했다. 삼례지역은 충
친한 친구들이 모여서 환갑잔치를 하기로 했다. 잔치는 우리끼리의 여행. 5년을 준비했다. 그러나 우리는 환갑 기념 여행을 떠날 수 없었다. 유행병은 세계적인 것이라서 누구를 탓하기도 어려웠다. 친구 하나는 우리가 ‘죽기 전에 100번 이상 만나기’로 한 약속을 지키야 한다며 부지런히 전화를 돌려 만남을 재촉했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사는 친구들이 죽기 전에 100번을 만난다는 것은 과연 커다란 숙제인 것 같았다. 그 친구가 노래를 보냈다. 위하여! 위하여! 우리의 남은 인생을 위하여! 들어라. 잔을 들어라. 위하여! 위하여! 이렇게 시작하는 안치환의 노래다. 제가 가끔 부르는 노래까지 동원하여 친구들의 감정을 충동질해대는 것이다. 노래는 시원하고 구구절절이 공감 100%지만, 늙어가는 자들의 추한 몸부림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실버산업이 최대 유망직종으로 꼽히는 시대고 실버 시장 규모가 수 십 조 원에 이른다고 하니 어깨에 힘 좀 주면 어떠랴 싶기도 하다. 감상에 빠져 안치환처럼 목을 빼고 노래를 한참 불러 본다. 목마른 세상이야 시원한 술 한 잔 그립다. 푸르던 오솔길 자꾸 멀어져 간다. 넥타이를 풀어라 친구야. 앞만 보고 달렸던 숨 가쁘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코로나19, 현재 우리는 위드코로나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2020년부터 코로나로 인해 새로 생긴 불편함이 참 많다. 이제는 마스크 없이 밖을 나서는 것이 상상이 안 될 정도가 되었고, 누군가의 가벼운 기침소리마저도 상당히 불안하고 불편해졌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코로나가 불러온 가장 큰 불편함은 사람들과의 소통이 대부분 줄어들거나 사라진 것이다. 2020년 이전까지만 해도 나는 다양한 모임과 활동으로 활기차고 바쁜 하루하루를 살았었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 자체에서 에너지를 얻기도,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며 그 자체에서 삶의 즐거움을 찾았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닥쳐온 코로나19라는 커다란 장애물로 인해 사람들과의 만남이 조심스러워지며 한때는 소수의 인원마저 쉽게 모이지 못하는 상황도 있었다. 물론 지금은 모두가 조심하며 몸을 사렸던 초기보다는 조금씩 모임이나 공동체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는 있지만 코로나19 이전에 비하면 확실히 사람들 간의 심리적인 거리감이 남아있는 것 같다.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주변 친구들이나 새로운 사람들과 다시 모임을 이어가거나 새로 만들어보려 노력했으나 잘 진행되지 않았다. 그전에 나부터가 의욕이 생기지 않
오미크론이 온 나라를 휩쓸고 병원으로, 약국으로 환자들을 모셔온다. 통계로만 전 국민의 1/4이 편찮으시다니 20년차 개업약사로 처음 겪는 일이다. 종합감기약이 동나고, 조제용 감기약도 매일 재고를 챙겨야 하는 긴장 속에 한 달여를 보내고 있다. 환자가 많아져 맘이 아프다. 치명률이 확 낮춰졌다지만, 지난주엔 사돈어른께서 흡인성 폐렴에 코로나 확진으로 고생하시다 입원 일주일만에 돌아가셔서 충격이었다. 이렇게 온 나라가 아프다. 그래도 한차례 오미크론으로 고생하면 다 끝날 줄 알았다. 오미크론 요 녀석 뒤끝이 장렬한 아이다. 탈모가 왔다는 30대 여성 직장인,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50대 언니들,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차서 마스크 쓰기 어렵다는 분, 기침이 시도 때도 없이 나와 눈치 보인다는 분, 불안하고 우울하다는 분…. 결코 사소하지 않는 불편한 증상들이 2주 3주… 어떤 경우엔 1년 이상. 오미크론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바이러스는 우리 세포에 있는 재료를 가지고 지들 유전자에 딱 맞게 스스로를 복제해낸다. 생물의 원초적 본능이라는 자손 번식을 남의 돈으로 다 해내고는 무한 반복으로 세포를 넘나드는데, 우리 몸이 그 꼴을 봐줄 수 없다. 우리 몸은 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