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와리에 유미나 씨 댁은 경로당 뒤편에 있었다. 전화를 해 보니 “아, 보여요. 들어오세요.”라고 한다. 넓은 마당을 지나 집 거실에 유미나 씨와 마주 앉았다. 생강차를 내어 오는 동안, 기자는 어린이 책 전집이 꽂힌 책장과 피아노, 그리고 너댓살 된 두 아이 사진이 걸려 있는 거실 풍경을 재빨리 훑어보았다. 가장 편한 아이 질문부터 시작해서 농사일, 베트남에서 이주하게 된 사연까지 이야기가 이어졌다.
아이가 초등학교 다니나 보네요? 아이 둘 다 6학년이에요. 내년에 삼례중학교에 가요.
농사는 딸기 하시겠네요? 여기는 거의 대부분 딸기예요. 시집 온 때부터 계속 하고, 시부모님 때부터 오래 전부터 했었어요. 남편이 하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죠. 처음에 왔을 때는 힘도 많이 들고 말도 모르고 힘든 일 많았죠.
고향에서는 어떻게 사셨어요? 베트남에서 원래 시골에서 살았어요. 그때는 공부만 했었죠. 부모님 조금씩 도와주는 수준. 베트남 있을 때 공부만 했으니까 한국에 왔을 때 농사일도 익숙하지 않고… 13년 되었어요. 이제는 익숙해졌어요. (한국말 잘 하시네요.) 우리말 많이 못해요.
그때는 공부만 했었죠. 살던 곳 이름은 하이퐁. 하노이 쪽에 있어요. 하이퐁은 큰 도시인데 제가 사는 곳은 농촌이에요. 여기처럼. 도시 주변에 농촌에 살았어요. 베트남 땅이 엄청 넓고 인구가 많아요.
고향에도 가끔 가시나요? 2, 3년에 한 번씩 갔는데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거기서 학교 다니다가 시집 와버렸어요. 대학교 6개월 다니다가 대학 학비 너무 비싸고 거기 숙식도 돈 들어가고. 부모님 힘들게 벌어서 학교 다니니까. 학비 부담스러워서. 그냥 시집가 버렸어요. 그때 우리 동네에서 한국 시집오는 사람 엄청 많아요. 중매자가 누가 아가씨 있으면은 너희 집에 한국 시집보내라, 여기 있는 것보다 돈도 벌고 부모님도 도와줄 수 있고. 처음엔 안 간다고 했는데 결국엔 그냥 가는 마음으로 결정하고 선 봤어요.
좀 아쉬워요. 공부하다가 (시집와서). 지금 우석대학교에서 대학 못 한 사람(을 위한 과정) 계획 중인데 갑자기 계획이 중지해 버렸어요. 이주여성 대학교 못 다니는 사람 신청하라고 해서 신청했는데 올해는 코로나 때문이고 뭐 때문이고 계획은 아직 이루어지지 못해요.
하이퐁에 있는 대학교에서 뭐 전공하셨어요? 회계.
엘리트 여성이셨네요(웃음).
처음에 오셨을 때 적응하는 데 어려움이 많으셨겠어요. 베트남에서 대부분 자전거랑 오토바이만 다니잖아요. 그때 저는 자전거만 타고 다녔어요. 오토바이도 못 타보고. 돈이 없어서 오토바이 못 사요. 버스도 몇 번 탈까 말까 해서…. 한국에 와서 집에부터 삼례까지 가면 멀미해요. 멀미 심해가지고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남편이 어디 데려간다고 해도 안 간다고. 멀미해서. 멀미 심해가지고 어디도 못 갔어요.
오자마다 몇 개월 후에 쌍둥이 임심해가지고 그거 더 힘들었어요. 차멀미도 하고 음식도 하나도 못 먹어요. 김밥도 못 먹고 피자도 그냥 빵만 먹고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입덧도 하고 멀미도 하고 음식도 안 맞고 제가 사서 베트남 식으로 요리해도 맛이 좀 안 나요. 음식 때문에도 힘들고 맵게 못 먹어요. 김치도 못 먹어요. 아예 매운 음식은 입에 안 대요. 베트남 사람들도 대부분 안 맵게 먹어요. 먹는 사람은 고추도 찍어 먹고 하지만 대부분 안 먹어요.
살이 쭉 빠지고 애기 점점 커지면서 빵만 먹었어요. 빵 먹고 과일이나 안 매운 음식이나 먹고 했어요.
지금은 애 낳고 나서 그래도 음식은 천천히 먹고 이제는 매운 거 조금씩 먹을 수 있어요. 김치도 먹지만 많이 맵게는 못 먹어요.
처음에 왔을 때 하리교회 사모님이 한국말 가르쳐줬어요. 그때 다문화센터 없었어요. 사모님이 베트남 외국인들 모여서 한국어 가르쳐주고 이러 저리 체험 데리고 가는데 저는 차멀미 때문에 못 가고 저는 근처만…. 가서 한국어 좀 배우고 집에 오는 선생님이 3개월 가르쳐 줬어요. 처음부터 기역 니은 가르쳐 주고.
지금은 제가 베트남에 있을 때보다 많이 변화했어요. 집집마다 성으로 짓고, 이렇게 평범하게 짓지 않아요. 프랑스식으로 짓고 완전히 달라요. 현대화하고. 대부분 우리 살던 동네 한국에 시집오는 사람 엄청 많아요. 한국 오고, 오스트레일리아 가고, 중국도 가고, 대만도 가고. 대부분 여자들은 다 외국으로 나가요. 남는 사람들은 남자예요. 저는 우리집이 농사짓고 돈 못 벌어서 부모님 못 도와주지만 다른 친구들은 자기 돈 벌고 부모님 도와주고 집 짓고 뭐 차 사고 이것저것 하면…. 아무튼 우리 동네 지금 많이 변화했어요.
소득수준이 높아졌어요. 한국에 시집오는 사람들은 부모님 돈 벌어서 집 짓고 그래요. 우리 같은 사람들은 농촌에 사니까 얼마 벌겠어요. 집 지어도 5천만 원 정도 들어요. 많이 들어가니까 여기서 우리 먹을 것도 부족하잖아요. 어머님도 못 도와주고. 엄마 아빠 아기 양육으로 5년 정도 한국에 있을 수 있어요. 5년 동안은 여기서 자식 돌봐주고 돈 벌고 거기 가서 집을 지어서. 그런 식으로 돈 벌어요.
이주여성 분들끼리 종종 모이시나요? 예전에 한 번 했는데 이리저리 바쁘고 지금은 만나고 싶은 대로 만나요. 시간 나는 대로. 내 친구들은 다 딸기 해요. 그래서 바쁘면은 같이 바쁘고 시간 나면 같이 나고 해요. 주로 베트남 사람…. 코로나 있기 전에 베트남 국수 만들어서 먹고 한 번씩 나가서 맛있는 거 먹고 와요.
쉬는 날은 주로 어디 놀러가세요? 예전에 한 십 년에는 아예 어디 못 가고 집하고 밭에 집하고 밭에만 왔다갔다했어요. 이제 제가 운전 해가지고 시간 날 때 애들이랑 전주 나가서 이것저것 롤러스케이트랑 뭐 어디 공원이랑 데려다 주고 같이 놀아요.
아이들 중학교 가면 시간이 좀 나시겠어요. 이제 커서 그것 좀 기대했는데, 이제 제 일을 해야죠.
원래 하시고 싶었던 것이 뭐예요? 제가 핸드메이드 좋아해요. 예전에 제가 머리핀 공부해서 자격증 따고 만들어서 인터넷 올려서 팔았어요. 그런데 점점 애들 크고 바빠지면서 안 만들었어요. 여유 시간 있으면 다시 하고 싶어요. 그것 말고도 핸드메이드는 뭐든 좋아요.
인터뷰를 마치고 <삼례사람들>을 펼쳐 보여드렸다. 유미나 씨는 <나무와 마을 이야기> 코너를 보고 “이거 우리 동네 나무인데?”라고 반가워한다. 그녀에게는 잘 사는 사람이 많아진 베트남 하이퐁의 고향도 우리 동네,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삼례 구와리도 이제 우리 동네였다.
변두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