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천수와 조수의 조우(遭遇) 현장, 해전(海田) 마을사 (3)

7. 해전리 원예농업사

7. 해전리 원예농업사

 

1) 원예농업 현황

 

해전리는 원해전, 중해전, 장연으로 이루어져 있다. 원해전과 중해전은 한 마을이다. 단지 행정상의 편의를 위해서 마을 내 서북방향으로 지나는 중앙도로를 기준으로 분리한 것뿐이다. 장연 마을이 해전리에 편제된 것은 의외다. 원해전과 거리상으로도 2Km쯤 떨어져 있고, 지형적으로도 철길 건너편이어서 공유되는 환경이 많지 않다. 물론 해전 마을 농경지가 철길 건너편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들녘으로는 장연마을과 맞닿아 있는 셈이다. 장연은 익산천 제방 아래 형성된 마을이다. 해전리는 원해전과 중해전을 합쳐서 100여 가호가 산다. 해전뜰이 상당히 넓어서 마을도 크다. 현재 해전리는 비닐하우스 원예농업지대여서 삼례 일대에서는 부촌으로 알려져 있다.

해전리 일대는 농업진흥구역이다. 과거 용어로 하면 절대농지 지역이다. 절대농지 개념은 1972년 「농지의 보전 및 이용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후 처음 등장했다. 절대농지 제도의 첫 번째 목적은 농지 감소를 방지하는 데 있었다. 1994년 「농지의 보전 및 이용에 관한 법률」이 폐지되고 현행 「농지법」이 1996년 1월 1일 시행되고, 절대농지란 용어는 농업진흥구역이란 용어로 대체되었다. 삼례평야는 그만큼 벼농사를 위한 우량농지 지역이다. 해전리도 전통적인 농업이 벼농사였다.

 

 

그런데 현재 해전리 주민들은 벼농사보다 원예농업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벼농사는 소수의 대규모 농가 외에는 식량을 위한 농사 정도로 비중이 격하되어 있다. 100여 세대가 사는 해전리 주민들 가운데 자가 농지를 지닌 거의 대부분의 농가가 원예농업 경험이 있고, 고령자가 되면서 더 이상 못하는 농가 외에는 현재도 50% 가까이 원예농업을 시행하고 있다.

삼례의 대표적인 원예농업이 딸기이다. 딸기농가는 거의 1모작을 한다. 반면에 해전리 원예농가는 딸기가 아니다. 딸기 아닌 작물로 2모작을 한다. 일부 농가는 3모작까지 한다.

해전리 원예농업의 대표적 작물은 수박, 배추, 대파이다. 근래에는 감자와 메론 작물이 확장세이다. 2모작의 경우, 대개는 수박과 대파, 혹은 수박과 배추, 또는 수박과 감자를 재배한다. 감자는 12월 하순에 캐는 겨울감자이다. 그러니까 전반기 수박은 상수이고, 하반기는 품목은 선택이다. 수박의 경우 2월 말에서 3월 초순에 심어서 6월에서 7월까지 수확한다. 수박농사는 3개월이 소요된다. 여름에는 토지나 농가나 잠깐 동안의 휴식기를 갖는다. 2모작 농가의 농한기인 셈이다. 이 기간에 다음 작물을 위해서 시비 등 토질관리를 한다. 다만 대파의 경우는 휴지기가 짧다. 빠르면 6월, 늦어도 7월에 파종해서 12월에 수확하기 때문이다. 대파 수확기는 익년 1~2월까지 이어진다. 쪽파 심는 농가도 있다. 가을배추를 재배하는 농가는 8월 말에서 9월 초순에 모종을 심는다. 이때 배추 대신 대파를 심는 농가도 많다. 근래 3~4년 전부터는 겨울감자 재배가 점차 늘고 있다.

3모작은 여름철에 한 종목을 더 재배하는 경우이다. 3모작은 드물다. 지력도 농민도 힘들고 지치기 때문이다. 3모작 농가의 여름철 종목은 오이였으나, 현재는 메론 재배가 늘고 있다. 3모작 세팅을 봄배추, 수박, 대파(쪽파)로 하는 경우도 있다. 봄배추는 1월에 모종을 심어서 4월에 수확한다. 그후 수박, 대파를 연이어 재배하면 3모작이 된다.

 

 

해전마을 원예농업을 자세히 보면 삼례의 대표작물인 딸기가 보이지 않는다. 상추도 없다. 농가소득으로 보면 딸기재배가 훨씬 높다고 한다. 딸기는 거의 1모작 품종이다. 딸기를 재배하는 농가는 “일 년 열석 달 일한다.”고 할 정도로 고된 작물이다. 반면에 같은 규모의 비닐하우스로 볼 때 타 품목보다 소득이 월등히 높다. 해전리는 왜 딸기를 재배하지 않을까?

지하수의 조건 때문이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해전리 지질구조는, 딸기농가가 집중되어 있는 삼례의 동부리 지역과 다르다. 신탁리, 구와리, 하리 등은 토양이 사석지대이다. 그래서 물빠짐도 좋고 지하수도 풍부하고, 수질도 좋다. 반면에 해전리는 조수가 밀고온 갯벌과, 하천이 범람하면서 쌓인 토사가 뒤엉켜 지반을 형성하였다. 지금도 땅을 2~3미터 파면 뻘층이 드러난다. 이러한 지질구조 때문에 해전리는 지하수에 문제가 있다. 이 마을은 옛날에도 식수문제로 곤란을 겪었다. 지하수가 좋지 않아서 샘이 없는 마을이다. 옛날에는 ‘똘물’을 그냥 식수로 사용할 정도였다.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지하수에 철분이 많아서 음료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지하수를 받아 놓으면 벌겋게 변한다. 산화되어 생긴 녹물같다. 철분이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동네 주민 누구나 알지만 동네 지하수에 왜 철분이 많은지는 알 수가 없다. 환장할 노릇이다. 그렇다고 간기(짠맛)가 있는 것은 아니다. 지층 깊은 곳이 갯벌이어서 그렇다는 것만 구전된 상식으로 알고 있다.

누군가가 딸기를 시험재배 하였다. 딸기는 비록 수막재배가 아니더라고 물을 자주 줘야 하는 작물이다. 그런데 비닐하우스에 지하수가 닿으면 마치 쇠에 녹이 난 것처럼 벌겋게 변색되었다. 비닐하우스가 변색되면 햇빛 투과가 차단되어 보온력이 상실된다. 그래서 대다수는 딸기농사를 시도하지도 않았다. 상추도 마찬가지 작물이다. 물을 자주 주다보면 상추가 변색될 우려가 있기에, 상품성을 고려한다면 굳이 고집할 품종이 아니었던 것이다.

 

원예농업 생산작물 판로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일명 ‘밭떼기’라고 하는 포전(圃田)매매가 있고, 농협을 통한 계통출하가 있다. 포전매매는 농민이 농산물을 재배하기 전부터 유통상인에게 계약금을 미리 받고, 수확할 때 약속한 양의 농산물을 넘기는 유형의 거래다. 해전리 원예농가는 대부분 이런 방식의 밭떼기 매매를 하고 있다.

밭떼기는 오래된 유통관행 방식이다. 그런데 이 경우 농민이 약자가 되어, 간혹 유통상인의 횡포가 지적되면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다. 과거에 주로 구두계약으로 이뤄진 것도 한 원인이었다. 농산물 가격이 예상보다 크게 떨어졌을 때 일부 유통상인은 그 하락폭을 농민에게 전가하는 식으로 계약을 위반하기 일쑤였다. 정부는 이 같은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 2013년, 양파, 양배추 등 저장성이 없는 농산물에 대해 '포전매매 표준계약서'를 사용하도록 의무화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아직도 비슷한 문제가 이어지고 있다. 농산물 거래대금 중 30%에 해당하는 계약금이 오갈 때는 별 다툼이 없다. 문제는 수확이 임박했는데 가격이 급락했을 경우다. 계약한대로 줘야 할 잔금을 대폭 깎으려고만 한다. 심지어 연락을 회피하면서 농민을 애태우는 유통상인이 적지 않다. 농산물은 생물이라 수확 시기가 넘어가면 진딧물 등 병해충도 생기고, 상품성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게다가 얼른 수확이 끝나야 다음 작물을 준비할 수 있다. 다급한 사람은 생산자가 되고, 유통상인은 이러한 심리를 역이용하려 한다.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유통상인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다.

포전매매가 이뤄지는 시기마다 지방자치단체는 포전매매 표준계약서를 지역 농협이나 읍·면사무소 등에 비치하고 교육을 실시하는 등 서면계약 활성화를 독려하고 있지만 한계가 있다. 양파, 양배추 등 특정 작물을 제외하고는 표준계약서 사용에 대한 강제성이 없기 때문이다. 계약서를 쓰더라도 사실상 무용지물에 불과한 셈이다.

2020년 겨울부터 대파가격이 상승하더니 2021년 봄에는 폭등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럼에도 해전리 대파재배 농가들의 수익이 증가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밭떼기 계약을 마친 후의 일이기 때문이다. 당시 유통상인들의 수익이 어마어마했다고 한다.

2021년 12월 현재, 대파가격이 하락세다. 지난 봄에 가격이 폭등하니까 농가의 생산량도 늘어난데다 풍년농사가 된 탓이다. 현재 해전리 비닐하우스에는 대파가 그득그득하다. 이미 수확했어야 할 시기임에도 유통상인들이 시세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고 있기 때문이다. 수확을 끝내야 다음 농사를 준비할 수 있는 농민들은 이래저래 애가 타고 있다.

이러한 폐단이 빈번해서 현재는 농협이나 원협에 계통출하하는 농가가 늘고 있다. 농가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속이 편하다고 한다. 계통출하는 생산자인 농민이 협동조합이나 농업법인 등 계통조직을 통해 생산한 농산물을 출하, 판매하는 것을 말한다. 계통출하는 중간 유통마진을 최소화해 생산자는 판매비용을 절약하고 위험부담도 줄이며, 소비자는 보다 저렴한 가격에 농산물을 구입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닌다.

현재 농산물 유통방식에 대하여 해전 마을 한 원예농민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기는 주로 밭떼기로 해왔고, 가락동으로 갑니다. 요즘은 품목에 따라 계통출하로 전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수박 생산량 가운데 반 이상은 농협 통해서 계통출하 해요. 수수료나 경비 제하고 입금이 되는 방식입니다. 농협은 하나로마트나, 대형마트에 팔아요. 상인하고 거래하면 골치 아파요. 상인은 손해를 보면 조금 보고, 벌면 많이 벌고 그래요. 작년에 대파 값이 폭등했거든요. 농민이 몇 백 만원 더 벌 때 상인은 수억을 더 버는 구조에요. 올해(2021년 12월)는 대파 값이 싸니까 상인들이 안 와요. 밭떼기로 넘겼는데, 상인이 가격을 보느라 수확을 해가지 않아요. 가령 밭떼기로 매매한 후에 작물상태가 안 좋으면 백번을 양보해서 가격을 깔 수는 있어요. 그런데 계약 후 출하시기에 가격이 하락하면 그것도 깔라고 해요. 좋을 때는 겨우 2~30만원 주면서 나쁠 때는 1~2백만 원을 깔라고 해요. 계약서를 써도 여차하면 휴지조각이에요. 상인은 단골이 많아도 상인은 상인입니다. 농협은 내가 지은 만큼 먹으니까 소득이 적을 수는 있어도 마음은 편해요.”

 

해전마을 농경지는 일제시기에 경지정리가 되었다. 한 필지가 1200평씩이다. 한 필지에 비닐하우스를 5동 설치한다. 비닐하우스 한 동은 길이가 100미터이고 폭은 5.5미터이다. 과거에는 더 좁아서 6동을 설치했다. 이 마을에서 원예농사를 많이 하는 농가가 5필지 정도이고, 평균 3필지 정도라고 한다.

 

2) 해전리 원예농업 1세대 공로자

 

해전마을은 언제부터 원예농업이 시작되었을까. 농업이라는 것이 전통성과 관행성이 강해서 새로운 작물이나 농법에 대해서 보수적이다. 가장 안정적인 농사만 해왔다. 오랜 세월 동안 벼농사 중심의 농업이었기 때문이다. 늘 부족한 것이 식량이어서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다. 농토는 작고, 자작논도 적고, 인구는 많은 조건에서 농경을 해왔다. 새로운 작물을 도입해서 실패할 경우 타격이 이루 말할 수 없다. 당장 '끄니'(끼니의 방언)가 걱정되는 곤궁한 삶이었기 때문이다. “선자 얻어 지은 농사 패농(敗農)하면 빚이 삼년”이라는 것을 누구나 잘 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하던 농사, 해 본 농사 위주로 해온 것이 사실이다. 농촌사회와 농경방식에 변화가 어려운 이유이다.

해전리도 마찬가지이다. 이 마을은 일제시기에 대부분 소작농이었다. 일본인, 드물게는 조선인 지주 아래, 고용된 것과 다름없는 농사를 지어왔다. 특히 일제강점기는 미곡증산에 총력매진하던 시기였다. 삼례평야도 대부분 일본인 지주들 손아귀로 들어갔기 때문에 말할 것도 없는 벼농사 전략기지였다.

 

전적인 벼농사지대가 현재는 혁신적일만큼 원예농업지역으로 탈바꿈되었다. 해전 마을에 ‘도마도집’으로 불린 농가가 있었다. 그때가 55년 전인 1967년 무렵이었다. 그 집에서 최초로 ‘토마토’를 재배했기 때문이다. 그 집은 짐작대로 토착민이 아닌 이주민이었다. 이 마을 주요 제보자 이석룡 씨는 “그 ‘도마도집’이 우리 동네를 근본적으로 바꾼 분이다. 그분이 토마토, 배추, 수박을 하니까 동네 사람들한테 확 붐이 일어난 것이다. 여기 와서 1200평 한 필지에서 시작했다. 우리동네 공로자다.”라며 유래를 알려준다.

1966년에 전주에서는 ‘팔복동 공업단지’ 계획이 인가되고 이듬해인 1967년에 1차 준공된다. 공단예정부지 주민들은 이주해야 했다. 당시 팔복동 신행리 주민 중에 조철도 씨가 있었다. 그는 팔복동에서 토마토 농사를 하고 있었다. 비닐하우스 아닌 노지(露地) 경작이었다. 그곳은 황방산의 동쪽 비탈면이었다. 대부분 논보다 밭이 많은 전작지대였다. 논은 천수답 다랭이 논에 불과했다. 그래서 밭작물이나 과수나무를 재배하는 농가가 많았다. 조철도 씨는 보상금을 받아 처음에는 전주로 이사하려고 준비하였다. 배운 것은 농사밖에 없었다. 보상금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그때 삼례 해전 마을에 살던 친형님의 충고가 있었다. “특별한 기술이나 재산도 없이 전주에 사느니, 해전으로 들어와서 농사짓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해전으로 이주한 해가 1966년이었다. 보상금으로 논 한 필지를 매입하였다.

 

 

“살던 전답이 팔복동 공단으로 들어가서 해전으로 이사 왔어요. 우리 형님(동서) 친정이 이 동네였어요. 시숙이 팔복동에서 미리 처가동네 해전에 들어가 살고 있었어요. 우리도 전주로 갈라다가 농사짓던 사람이라 해전으로 왔는데, 후회했어요. 일이 하도 많아서.

여기 오니까 원예는 없었고 들깨, 땅콩이나 심더라고요. 우리는 토마토했어요. 팔복동에서 토마토는 키웠지만, 노지(맹상)로 키웠지 하우스는 안 했었어요. 팔복동에서는 깊은 시암에서 물 길어다 주고, 약도 시방은 덤벙덤벙 주지만 그때는 붓끝으로 조금씩만 발라도 토마토가 그렇게 잘됐어요. 팔복동에 살 때도 토마토는 우리동네서 우리만 했어요. 그대신 팔복동 남편 친구들이 ‘상리’라고 거기서 사는디, 그 사람들이 원예를 했어요. 우리 쥔양반이 원예 계도 들고 그랬어요. 원예가 퍼져서 주촌리호박, 지드란헌 것도 하고 그랬어요. 우리는 황방산 밑에 신행리에 살았어요. 동네가 버드리도 있었고, 감천리도 있었고요. 신행리가 공단으로 가장 많이 들어갔어요.”

 

조철권 씨의 부인 이점순 씨가 해전으로 이사할 당시가 29세, 남편은 33세였다. 이 마을로 이주한 뒤 낳은 아들이 현재 쉰셋이다.

 

“우리 집더러 ‘도마도집’이라고 했어요. 여기 와서 몇 년 하다가 연신 딴 사람들이 했어요. 쥔양반 친구들이 따라 했어요. 전주원예조합에 들었어요. 그 뒤로 동네 사람들도 많이 했어요. 토마토는 여기와서 처음으로 하우스로 했어요. 그때는 큰 대나무로 했어요. 통대나무 갖다 양쪽에 꽂아놓고 양쪽 끝을 붙잡아서 지푸락으로 쨈매요. 그게 힘들어요. 눈이 많이 오면 짜그라들고 그랬어요.

수확 후에는 하우스를 철거하고 모를 심어요. 논에다 했으니까. 파이프로 할 때도 철거하고 모 심었어요. 나락 심은게 연작피해 없었어요. 그때는 땅속에 지푸락을 꽉 쟁여요. 토마토 모를 키울 때. 지푸락을 쟁여서 그 위에 흙을 붓고 토마토 모를 심고 가마니떼기를 저녁 때 덮고 아침에 열고, 열고 덮고가 일이에요. 토마토 심은 뒤에 활대를 꽂아서 터널 만들어서. 이중보온이지. 그때는 지줏대도 나무때기로 꽂아서 하고. 또 약 칠해야 하고요. 열매 만드는 수정약. 지금은 벌로 수정을 시키지만 그때는 그릇에다 약 담어가지고, 꽃 나와서 시들기 전에 일일이 수정약을 정궈야(적셔야) 해요. 말도 말어요.

토마토 수확하면 하우스 철거하고 모심어요. 토마토는 4~5월경에 따요. 그런게 벼 타작 후에 토마토 농사 시작하지요. 겨울에서 초봄까지 커가지고 4월에서 5월까지 따요. 처음에는 우리만 몇 년 하다가, 우리 쥔양반 친구들 둘이 시작해서 셋이 같이 했어요. 그 뒤로 연신 퍼져서 동네가 겁나게 했어요.”

 

그를 통해 원예농업 도입 초기의 실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도 비닐하우스 농법은 해전에 와서 처음 시도하였다. 처음에 해전 주민들은 관망만 하였다. 초기에 조철도 씨 친구 두 분이 토마토 농사에 동참하였다. 해전 주민들은 농한기에 일손이 없던 시절이라 조철도 씨 토마토밭으로 품팔이 노동을 다녔다. 유휴인력이 남아돌던 시절이라 서로 품을 팔려고 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토마토 경작법을 익힌 동네 주민들이 원예농업에 동참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는 토마토는 익산으로 많이 다니고, 수박은 전주 금암동 ‘약깡’으로 냈어요. 익산은 리아카로 실어날랐어요. 그때는 리아카 삯군이 있었어요. 우리집 양반이 차를 먼저 부렸어요. 전주까지는 차로 다녔어요. 동네 사람들이 우리 때문에 (원예가)퍼졌다고 해도 시방이 어떤 세상인데, 우리 아니었어도 다 했을 거요.”

 

 

김성식 박사(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 특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