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례교 아래 남아 있는 옛길 흔적, 사진: 김왕중 기자> 삼례는 양파와 같은 도시이다. 작은 소읍이지만 가는 곳마다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즐거운 곳이다. 삼례의 유래에 대해서는 만경강과 소양천, 전주천이 만나면서 커다란 강을 이룬다는 뜻의 ‘한내’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전라 관찰사를 두 번이나 지낸 이서구가 삼례를 지나며 회안대군 방간이 유배 생활을 했던 봉동을 향해 세 번 절을 했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삼례라는 지명은 고려사절요에 남아 있다. 고려의 현종은 거란의 침입을 피해 나주로 피난을 가면서 ‘삼례’에서 묵었다. 당시 전주는 이미 호남의 대표도시였지만 전주에 들어가지 않고 삼례에서 묵었던 이유를 후백제 세력이 아직 남아 있어 전주에 들어가면 위험하다는 신하들의 의견이 있었기 때문이라 적고 있다. 이처럼 삼례는 천 년 전부터 교통의 중심지였다. 조선 시대 현대의 고속도로와 같은 역할을 하는 ‘삼남대로’와 지선 역할을 하는 ’통영별로‘가 삼례에서 분기하였다. 삼남대로는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를 지난다고 하여 붙은 이름으로 한양에서 출발하여 제주도까지 이어진 도로로 한양에서 유배를 떠났던 송시열, 정약용, 김정희 등이 지났던
2. 석전리 경지정리사업과 수로의 변화 석전리는 오른쪽에 수계리, 왼쪽에 신금리를 두고 있다. 또 북쪽에는 봉동읍 구암리가 있고, 남쪽에는 삼례읍 구와리가 있다. 삼봉신도시가 삼봉로 건너편에 들어섰고, 삼봉로 남쪽에 위치한 삼례동초등학교도 석전리 남신정 구역이다. 왼쪽 우동천 일부 지역도 석전리 구역이다. 현재 석전리를 지나는 가장 큰 수로는 우산천(제1도수로)이다.5) 석전리 남단을 동에서 서로 횡단하는 우산천은, 석전리 맨 왼쪽에서 우동천과 합수한다. 우동천은 북쪽 구암리에서 남쪽 석전리로 흐르는데, 석탑천이라고도 부른다. 따라서 석전리는 동에서 서로 흐르는 우산천과,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우동천이 합수되는 곳이고, 이곳에서 하나의 몸이 된 하천은 우산천이라는 이름으로 신금리를 지나 삼례리 찰방다리를 건넌다. 찰방다리를 건너는 구간을 ‘독주항’(犢走項)이라고 하며, 독주항을 빠져나온 후 ‘대간선’ 이름으로 옥구저수지까지 치닫는다. 그런데 우동천과 우산천의 현재 위치와 모습은 모두 1987년 「석전지구 경지정리사업」의 산물이다. 경지정리사업 이전만 해도 두 개의 하천은 심하게 곡류하는 사행천(蛇行川)이었다. 직선화된 현재의 모습도 이때 새로운 하천구간을 신
석전리는 말 그대로 ‘돌밭’(石田)이라는 지명이다. 현재는 일부 텃밭을 제외하고는 밭을 거의 볼 수 없다. 그러나 100년 전만 해도 밭이 천지였다. 달리 밭이 많았던 것이 아니다. 지대가 높아서 물이 닿지 않으면 밭이고 낮아서 물이 들어가면 논이었다. 석전리는 우산천과 우동천이 합수되는 곳으로, 큰비가 쏟아지면 수로가 좁아서 배수가 원활하지 않았다. 그러니 논이며 취락지로 물이 쏟아졌다. 제방이 재래식이던 시절에는 홍수에 제방도 터져 나갔다. 삼례 ‘동부리’지역 토질은 사석토 지대가 매우 광범위하다. 석전리 북쪽 구릉성 야산 아래쪽, 가령 청등, 정산, 학동과 신정리 일부에 해당하는 점질토지대를 제외하면 전체가 사석토이다. 1990년대에 가장 왕성했던 육상모래 채취는 다 사석토지대에서 이루어졌는데 신탁리, 석전리, 하리, 구와리, 신금리 등 채취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현재 삼봉신도시 택지구역으로 수용된 곳도 ‘모래거리’를 비롯하여 완전한 사석토 지대이다. 석전리에는 어떠한 자연현상으로 사석토지대가 형성되었을까? 우산천이 수백 년을 범람해 왔다고 해도 수로의 폭이 좁고, 구불구불해, 범람시에 모래자갈이 휩쓰는 영향권은 한계가 있다. 그렇게 볼 때 이
5. 만경강과 살아온 이영이의 ‘가난타령’ 한평생 이영이(85세, 1938년생) 씨는 태어난 삶터가 비비정이다. 결혼도 비비정 총각이랑 해서 지금껏 비비정에 산다. 친정아버지도 시아버지도 마찬가지로 안좌리에 사셨다. 안좌리가 침수피해를 입자 비비정으로 이주하였고, 그 후손이 된 이영이씨는 비비정에서 태어난다. 안좌리에 대한 그의 기억은 전언(傳言)일 뿐이다. “그전에는 안좌리에서 농사를 지었는디 한물이 졌어. 물이 논으로 쏟아져서 논을 메꿔버렸어. 그러니 빚내서 장리쌀로 살았어. 거기가 비만 오면 한물져버리는 디여.” 부모나 조부가 안좌리에서 이주했다는 점에서 비비정 사람들의 기억은 거의 동일하다. 그는 앞에서 인용한 것처럼 모래자갈 채취나 고기잡이 등에 대해서 기억을 상세히 구술해 주었다. 어린 시절에 겪었을 해방이나 전쟁에 대한 기억을 물었다. 참혹한 가난이 딸려 나왔다. “내가 여덜인가 아홉에 해방되고, 열세 살 때 전쟁 났어. 나는 가난해가지고 전쟁 때 여기서 안 살았어. 우리 엄마가 딸도 하난디 넘의집 보냈어.” 절대가난의 시절, 자식들은 또 거듭거듭 생긴다. 먹을 것 없는 입이 무섭다. ‘입 하나라도 던다’고 남의 집으로 보낸다. 여아는 심부름꾼이
4. 김영두 초대 이사장의 비비정 사모곡 1) 삼례 2층 한옥집에서 비비정으로 피난살이 김영두(75세, 1948년생) 씨는 공모 당시 추진위원장을 역임했고, 이후 <사단법인 비비정> 이사장도 역임한 바 있다. 김영두 씨는 삼례신협에서 전무로 퇴임한 후 신협 이사장도 역임하였다. 김영두 씨는 비비정 마을에 현재도 거주하고 있지만, 비비정 마을의 형성배경이었던 안좌리 침수지역 이주민과는 입향 사정이 달랐다. 그의 조부는 삼례초등학교 부근에 있던, 삼례에서 유일했던 2층 한옥집이었다. 삼례 사람들은 익히 아는 집이다. 조부는 정치운동가로서 김구 선생이 당수였던 ‘한독당’ 활동을 하였다. 6·25전쟁이 터지자 조부와 가족은 비비정으로 피난을 나온다. 세 살 남짓 어린 김영두도 가족 따라서 비비정에 들어온다. 미군의 폭격이 심할 때였다. 비비정 산기슭에는 몸을 숨길 수 있는 반공호가 많았다. 폭격을 피해서 숨기도 하고, 우익도 숨고 좌익도 숨어서 화를 피하던 굴이었다. 삼례 2층집이 이때 폭격으로 불타버렸다. 돌아갈 집이 사라졌다. 어른들은 대책이 없었던지 비비정 마을에 주저앉아 버렸다. 조부가 사거(死去)하고, 당시 대장촌초등학교 교사였던 부친마저 병환으
3. 비비정 주민들의 애환, 역경의 세월 1) 강변 하천부지 경작과 정부의 회수조치 이들의 삶은 가파른 벼랑 끝이었다. 남자들은 자포자기한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단명한 남자들이 많았다. 지금 비비정 마을에 고령의 여성들이 주류를 이룬 원인과도 무관하지 않다. 농지가 없는 주민들의 생계수단은 만경강뿐이었다. 이들은 제방 안쪽의 하천부지를 개간하여 밭을 일구었다. 밭에는 호밀, 밀, 서숙(조) 등 곡물이 되는 작물을 경작하였다. 만경강은 중하류로 갈수록 바닷물 왕래로 갯펄이 퇴적되면서 간석지가 넓게 형성된다. 이런 곳에는 주로 나문재, 갯갈대, 함초 등 염생식물이 산다. 일제강점기 때는 강 하구 쪽을 대규모로 간척하였다. 해방 후에는 만경강 중류 지역에서 간석지를 개간하여 논으로 만든 곳이 많았다. 주로 개인적으로 일명 ‘땅뙤기’라고 하는, 삽 한 자루로 제방을 쌓아 논을 만들었다. 일부 업자들은 장비를 투입하여 꽤 큰 규모도 조성하여 불하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조성한 소규모 간척지는 사인 간에 매매도 이루어졌다. 하천부지임에도 이런 방식으로 경작지를 늘려나간 사례가 많았다. 만경강에서는 주로 김제시 백구면, 청하면, 만경면, 옥구군 대야면 등이 그랬다.
1. 비비정 야산이 ‘수도산’인 내력 고산천, 소양천, 전주천이 합류하여 비로소 강다운 강을 이루는 곳, 삼례 비비정 마을이다. 만경강 본류가 시작되는 지점에 비비정 마을이 있고, 풍광이 빼어난 정자(亭子) 비비정(飛飛亭)이 있다. 비비정 마을과 정자 비비정은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전형답다. 산다운 산이 전무한 삼례땅에 배산임수라니? 삼례에는 ‘수도산’이 있다. 사실 이렇다 할 이름조차 없던 구릉성 산지, 기껏해야 해발 30미터쯤 될까? 이 산을 삼례 사람들은 ‘수도산’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일제강점기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묘하다. 이 산에서는 두 가지 공사가 벌어졌는데 공교롭게도 두 사업명 모두 ‘수도’가 들어간 사업이다. 그 중 한가지는 수도(水道)사업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상수도사업이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 혹은 1922년, 당시 이리(裡里)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상수도가 필요했다. 익산지역은 예나 지금이나 별다른 수원이 없어서 식수문제가 늘 현안이 되는 도시이다. 근래까지도 익산지역 주민들은 고산 어우리 취수구에서부터 시작되는 대간선도수로, 즉 농업용수를 정화해 식수로 사용해왔다. 일본인들은 특별한 상수도를 개발했다. 삼례지역은 충
8. 하천부지 농경사 해전리에는 하천부지가 많다. 2014년까지 농사짓던 농경지였다. 당시 ‘4대강사업’과 관련하여 전국적으로 하천부지에서의 농경행위를 일체 금지시키는 바람에 2015년부터는 농사를 못 짓고 재자연화 하게 되었다. 해전마을 하천부지는 제방 안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제방 바깥쪽, 그러니까 제방과 마을 사이에도 하천부지가 존재한다. 삼례 일대에서 하천부지가 가장 넓은 곳이 해전 앞이다. 군산 앞바다 밀물이 밀려들어오는 마지막 구간이 해전이어서 해전 농경지 토양의 심토는 뻘층으로 형성되어 있다. 또 고산천은 상류에서부터 밀고 내려온 모래자갈을 해전까지만 운반해 놓는다. 그래서 해전은 갯벌과 사석이 공존하는 점이지대가 된다. 갯벌과 사석 간에는 시차에 따라 적층시기가 달라진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갯벌이 우세하였다. 비비정까지 조수와 어선이 문제없이 왕래하던 시기까지는 갯벌이 더 밀고 올라다. 제방이 없던 시절이어서 조수가 넓게 퍼진 만큼 갯벌도 넓게 쌓여왔다. 만경강 하구부터 위쪽으로 차츰차츰 갯벌이 퇴적되면서 하상이 높아지고 조수도 약해진다. 조수가 약해질수록 이번에는 고산천 영향이 우세해진다. 갯벌 위에 이번에는 사석이 충적된다. 제방
7. 해전리 원예농업사 1) 원예농업 현황 해전리는 원해전, 중해전, 장연으로 이루어져 있다. 원해전과 중해전은 한 마을이다. 단지 행정상의 편의를 위해서 마을 내 서북방향으로 지나는 중앙도로를 기준으로 분리한 것뿐이다. 장연 마을이 해전리에 편제된 것은 의외다. 원해전과 거리상으로도 2Km쯤 떨어져 있고, 지형적으로도 철길 건너편이어서 공유되는 환경이 많지 않다. 물론 해전 마을 농경지가 철길 건너편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들녘으로는 장연마을과 맞닿아 있는 셈이다. 장연은 익산천 제방 아래 형성된 마을이다. 해전리는 원해전과 중해전을 합쳐서 100여 가호가 산다. 해전뜰이 상당히 넓어서 마을도 크다. 현재 해전리는 비닐하우스 원예농업지대여서 삼례 일대에서는 부촌으로 알려져 있다. 해전리 일대는 농업진흥구역이다. 과거 용어로 하면 절대농지 지역이다. 절대농지 개념은 1972년 「농지의 보전 및 이용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후 처음 등장했다. 절대농지 제도의 첫 번째 목적은 농지 감소를 방지하는 데 있었다. 1994년 「농지의 보전 및 이용에 관한 법률」이 폐지되고 현행 「농지법」이 1996년 1월 1일 시행되고, 절대농지란 용어는 농업진흥구역이란 용어로 대체되었
4. 뒷냇갈이라고 부른 대간선 분기수로 해전 취락지는 제방과 120미터쯤 떨어져 있다. 이 구간이 지금은 논으로 말끔히 개간되어 있지만 과거에는 대부분 ‘앞냇갈’이라고 부르는 하천부지였고, 밭을 일구거나 과수원을 하던 전작지대였다. 그러면 ‘뒷냇갈’은 어디를 말하는가. 후정리를 지나는 대간선수로에서 분기한 수로를 말한다. 이에 대해서도 이석룡의 진술을 참고하기로 한다. “뒷냇갈은 대간선 물이에요. 비비정에서 철로 지나가는 길 밑으로 ‘땅수문’을 파가지고 한내 물을 대간선에 공급해요. 한내다리에서 보면 수문 여러 개가 보이잖아요? 거기에서 물을 취수해서 대간선으로 보내요. 지금은 그 수문을 닫아버렸어요. 삼례 대명아파트 뒤로 복개도로가 대간선 줄기인데, 후정리 제수문 앞에서 우리 동네로 오는 수로가 나뉘어요. 그 물을 받아서 우리 동네 뒷개울로 들어와요.” 이석룡의 설명을 종합하면 이렇다. 대간선수로는 고산면 어우리보 취수구에서 시작하여 봉동 구미리를 지나 석전리로 향하고, 신금리와 삼례 마천을 지나 춘포 봉개 쪽으로 나간다. 삼례는 대간선수로에 물을 재공급하는 곳이다. 만경강 물을 대간선수로에 보충하는 것이다. 그곳이 한내다리 아래 설치된 한내보, 제수문,
1. 지리적 특성 해전은 지명에서부터 물과 관련이 깊다. 조수가 들어오던 마을임을 직감할 수 있다. 만경강 상류에서 내려오는 강물과 서해에서 올라오는 조수(潮水)가 드나들며 형성된 충적층이 들판이 되고, 사구가 형성된 지대에 촌락이 들어선다. 해전뜰과 해전마을의 이력이 그러하다. 해전은 하천수보다 조수가 우세해서 얻은 지명이다. 한편 만경강은 해전부터 백사장이 형성된다. 이때는 조수보다 하천이 우세한 현상이다. 만경강이 고산천 상류로부터 거세게 내려오다가 해전 앞에 이르러 강을 이루며 순해진다. 상류로부터 모래를 몰고와 백사장을 이루고, 하류로부터는 조수가 미립자를 밀고와 하천부지를 마련하였다. 해전 앞은 넓은 하천부지와 명사십리를 방불케하는 백사장이 동시에 병존하는 곳이다. 해전 마을 토질은 비비정 동쪽, 즉 하리나 와리, 신탁리 등과 다르다. ‘동부리’는 사질토가 우세한 반면에 ‘서부리’는 점질양토(粘質壤土)가 우세하다.1) 따라서 서부리는 동부리에 비해 표토가 깊으면서도 점토 성분이 많아 유기질이 풍부하다. 점질양토는 배수도 잘 된다. 동부리 땅은 사석토여서 배수가 헤플 정도로 잘 된다. 논물이 머물지 않고 쉽게 빠져나간다. 문제는 논에 물이 머물러있어
5. 어전리 농사여건과 변천과정 1) 어전리 홍보문구는 ‘명품쌀’ 삼례 사람들은 삼례 일대에서 밥맛이 가장 좋은 쌀로 ‘어전쌀’을 꼽는다. 어전리 사람들도 이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하다. 그러면서도 썩 달가워하지는 않는다. 지금 와서 쌀이 좋고 밥맛이 좋아봐야 뭐하냐는 식이다. 이렇듯 농촌에서도 벼농사지대는 아무런 보람이나 영화를 누리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여기는 질땅이라 물이 안 빠져서 하우스를 못합니다. 오로지 벼농사만 해요. 농민의 날 행사장에 가면 어전리는 ‘명품쌀’이라는 홍보문구를 붙여놓습니다. 내세울 게 그것밖에 없어요. 해전은 수박자랑, 신금리는 딸기자랑하는데 우리는 밥맛밖에 없어요. 공장이 있나, 짐승을 키우나, 하우스를 하나, 그런 게 없으니까 깨끗하고 청정하기는 합니다.”1) 정관옥의 위 말 속에는 현단계 농가소득의 현실이 담겨 있다. 즉 공장지대여서 부동산 가치가 있거나, 축산을 하거나, 원예농업을 하지 않으면 농촌에서 소득을 올리기 힘들다는 점이다. ‘청정하기는 하다’는 말이 자조적인 말로 들릴 수밖에 없다. 어전리 쌀이 명품인 까닭은 말 그대로 ‘질땅’이기 때문이다. 삼례의 토질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비비정 동부지역은 대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