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 사전 9

덩치

-몸의 부피

고백하건대 10여 년 동안 앞만 보고 살았다. 모두 그 녀석 탓이다.

그 녀석과 헤어지고 나는 한참 동안 우울했다. 앞만 보고 살았는데 갑자기 앞이 사라졌다는 상실감. 내 곁에서 사라진 녀석 때문에 나는 투덜거림을 앞세웠고 불평불만을 입에 달고 살았다. 다시 녀석과 비슷한 녀석을 만나야겠다는 욕심에 이곳저곳을 기웃거렸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녀석과 비슷한 녀석에 대해 수소문했다.

그사이 봄이 왔다. 앞이 사라졌다는 상실이었을까? 아니면 녀석과 헤어진 불편함이었을까? 나는 봄을 외면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앞을 잃었다고 믿었고 여전히 앞만 보았다. 나는 영악하므로 잃은 것을 잃지 않았다고 최면을 걸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그를 만났다. 녀석과는 다른 덩치가 큰.

전주 근교에 위치한 완주군 삼례읍이었다. 모 대학 한국어교사로 있던 나는 일을 마치고 일찍 버스에 올랐다. 삼례발 익산행 좌석버스 111번. 자리에 앉아 시집을 꺼내 읽다가 무심결에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 바라본 것이 아니라 훔쳐보았다. 파랗게 올라오는 보릿대의 싱그러움을, 보릿대 잎사귀 사이사이 뛰노는 봄의 기운을. 그러다 덜컹.

나는 보았다. 버스 바퀴에서 튕긴 주먹만 한 돌이 봄볕을 가르고 보릿대를 향해 날아가는 아니 뛰어드는 궤적을. 느닷없이 10여 년 동안 녀석에 올라타 앞만 봐왔던 일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자동차라는 이기에 철저히 길들여진 채 좁아터진 나의 시야를, 영악하다고 믿었던 내가 문명과 과학이 만들어내는 이기에 세속돼 있었음을. 그 일을 끝으로 자동차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그리고 나는 영악한 것이 아니라 둔하다는 것을 새삼스레 알게 되었다.

나는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삼례와 익산을 오가는 좌석버스 111번에 몸을 싣는 일이 많다. 익산 도심을 거쳐 덕실을 지나고 옛 지명이 봄나루인 춘포(春浦)도 지나고 익산과 삼례의 경계를 잇는 개울다리 익산교도 지나고 삼례파출소도 지나는 111번 좌석버스. 이 버스에 올랐다면 먼저 차창 밖에 있는 것들을 예의주시해야 한다. 계절이 만드는 풍경은 둘째치고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목 움츠린 옛 가옥들, 타고 오르는 할매들의 사투리들. 어디 그뿐이랴 바퀴에 튕긴 것들이 그려내는 그림도 보아야 하고 강변 꽃길에 걸린 석양도 봐야 한다.

그뿐만 아니다. 행여 삼례에서 익산으로 오는 막차에 오를 때면 환한 실내조명을 죄다 꺼주기도 한다. 캄캄함 속에 앉아 논밭 사이로 다닥다닥 불 켜진 창문을 보는 일이나 자동차 헤드라이트 없이 가로등이 만드는 쓸쓸함을 바라보는 일들. 또한 내가 마지막 손님이라도 된다면 노선을 벗어나 버스로 집 앞에 내려주는 호사로움도 맛 볼 수 있다.

삼례와 익산을 오가는 좌석버스 111번. 버스에는 별것이 없다. 흔하디흔한 것들로 넘쳐나는 것이 111번 버스이다. 하지만 앞만 보고 운전하는 이라면, 문명과 이기의 편함에 길들어진 이라면 한번쯤 몸을 실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꼭 삼례와 익산을 오가는 111번이 아니어도 좋을 것이다. 버스가 만들어주는 그 소소함에 등을 폭싹 맡겨보시라.

김성철 시인

시집 『달이 기우는 비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