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례교 아래 남아 있는 옛길 흔적, 사진: 김왕중 기자>
삼례는 양파와 같은 도시이다. 작은 소읍이지만 가는 곳마다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즐거운 곳이다. 삼례의 유래에 대해서는 만경강과 소양천, 전주천이 만나면서 커다란 강을 이룬다는 뜻의 ‘한내’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전라 관찰사를 두 번이나 지낸 이서구가 삼례를 지나며 회안대군 방간이 유배 생활을 했던 봉동을 향해 세 번 절을 했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삼례라는 지명은 고려사절요에 남아 있다. 고려의 현종은 거란의 침입을 피해 나주로 피난을 가면서 ‘삼례’에서 묵었다. 당시 전주는 이미 호남의 대표도시였지만 전주에 들어가지 않고 삼례에서 묵었던 이유를 후백제 세력이 아직 남아 있어 전주에 들어가면 위험하다는 신하들의 의견이 있었기 때문이라 적고 있다. 이처럼 삼례는 천 년 전부터 교통의 중심지였다.
조선 시대 현대의 고속도로와 같은 역할을 하는 ‘삼남대로’와 지선 역할을 하는 ’통영별로‘가 삼례에서 분기하였다. 삼남대로는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를 지난다고 하여 붙은 이름으로 한양에서 출발하여 제주도까지 이어진 도로로 한양에서 유배를 떠났던 송시열, 정약용, 김정희 등이 지났던 길이다. 통영별로는 삼례에서 분기하여 전주, 남원, 함양을 지나 통영으로 이어지는 길로 이순신 백의종군 길로 유명하다. 신경준은 저서인 ‘도로고’에서 ‘길은 그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 주인이다.’라고 했다. 삼례를 지났던 이들의 이야기가 삼례의 자원임을 밝히는 근거이다.
교통의 요지 삼례는 매우 중요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가 억울한 죽임을 당하고 교도들은 교조인 최시형의 신원 회복을 희망하며 이곳 삼례에서 모였다. 전라감사의 거절로 실패하였지만, 서울에서 복합상소를 올리는 계기를 만든 사건이다. 이후 녹두장군 전봉준이 ’척양척왜‘, ’제폭구민‘, ’보국안민‘, ’광제창생‘을 외치며 일어섰던 곳이기도 하다.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했던 일본인 미나미 고시로는 ’삼례에는 동학농민군이 아닌 사람이 하나도 없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삼례 출신 동학농민군이 5천 명이라는 기록도 있어 당시 삼례는 동학이 매우 흥했던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삼례가 교통의 요지였으며, 너른 들이 있어서 곡식이 풍부하고 10만 명이나 되는 많은 동학군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 5천 명 이상의 동학교도가 있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삼례에 동학교도가 모이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은 일본과 청나라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고 삼례에는 가장을 잃은 집이 태반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은 삼례에 큰 생채기를 남겼지만, 그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채 일제강점기를 살아내야만 했다. 동학농민혁명 실패 후,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은 크게 무장투쟁, 실력양성, 소작쟁의로 전개된다.
<1928년 설치된 구 만경강 철교는 국가등록문화재이다. 사진: 김왕중 기자>
1895년 역참이 폐쇄되고 1914년 11월 전주-삼례-이리를 잇는 경편열차가 운행을 시작하며 삼례역이 설치되었다. 경편열차는 미쓰비시(三菱) 동산농장의 농산물을 이리까지 운반하기 위해 건설된 협궤열차로 민간이 운영하는 사철이다. 1917년 경성-목포, 삼례-고산 사이의 도로가 만들어졌으며, 1921년 10월 13일 자 동아일보는 고산과 삼례 사이에 마차가 운행되어 학생들이 전주와 이리로 통학한다고 보도했다. 일제강점기에도 삼례는 교통의 중심이었다.
1910부터 1918년까지 토지조사사업을 벌인 조선총독부는 동양척식회사와 금융조합을 앞세워 조선 농민을 수탈한다. 땅을 빼앗긴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고향을 등지고 도시로 나가 막노동을 하거나 만주 등 해외로 이민을 떠나야 했다. 삼례에는 백남신의 화성농장, 박기순 농장, 호소카와, 후지, 구마모토, 이엽사, 이등농장 등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