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리, 유리 구와리에는 전와마을과 함께 전주유씨 집성촌이 한 곳 더 있다. 바로 버드리라 불리는 유리이다. 전와마을에서 뒷내를 따라 만경강 쪽으로 걷다 보면 만나는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는 빨래터가 있었는데 지금은 집에 상수도가 들어오고 세탁기가 보급되면서 폐허로 남아 있다. 유리는 버드나무가 많은 마을이어서 유리, '버들 유(柳)‘자를 쓰는 전주 유씨가 모여 사는 마을이어서 유리라고 부른다. 지금은 버드나무가 없지만 3, 40년 전만 해도 이 마을엔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마을에서 딸기 농장을 운영하는 유흥옥 씨는 농장 이름을 ’버들피리‘라고 소개하였다. 지금은 사라진 버드나무를 추억하며 농장 이름을 지었단다. 현재도 유리는 버들 유(柳)‘자를 쓰는 유씨 집성촌으로 다른 성씨들은 외지에서 새롭게 들어온 사람이거나 고종사촌들이다. 마을 전체가 한 가족인 셈이다. 마을에 들어서면 매우 이색적인 모습을 보게 되는데 강돌을 쌓아 만든 담이다. 70년대, 새마을 운동이 한창일 때 만들어진 것으로 마을 어른들이 손수레로 마을 앞내인 만경강에서 강 돌을 실어와 손수 만들었다. 마을이 현대화되면서 많이 바뀌었지만, 아직도 제 역할을 감당하는 담
전와마을에는 거대한 팽나무 두 그루가 있었지만 한 그루는 2019년 여름 바람이 많이 불던 어느 날 쓰러져 버렸고 현재는 한 그루만 남아 있다. 대나무로 만든 딱총에 팽나무의 열매를 넣고 쏘면 ‘팽’ 소리가 난다고 해서 팽나무라고 부른다. 팽나무는 주로 서낭당의 역할을 하였다. 서낭은 마을 지킴이로 경제적으로 어렵거나 사당을 짓기 어려운 입지 조건일 때 마을 입구에 있는 커다란 나무를 서낭으로 삼아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셨다. 어쩌면 가난했던 전와마을도 사당을 지을 형편이 안 되어 마을 입구에 있는 이 커다란 팽나무를 서낭으로 모셨을지도 모른다. 팽나무가 있는 전와마은 앞에 있는 와리라는 뜻이고, 새터라고도 부르는데 새롭게 생긴 마을이라는 뜻이다. 2019년 태풍으로 쓰러진 팽나무 대신 어린 팽나무를 심어 놓았다. 노거수는 100년 이상 된 오래된 나무로 땅에서 약 1.2m 높이에 있는 나무의 둘레가 3m 이상인 거목으로 노수(老樹)· 노목(老木)· 고목(古木)이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 주변의 노거수들은 마을의 역사와 전설, 고사를 담고 있으며 그들의 연륜으로 인해 신령한 존재였다. 주민과 함께 살아온 오래된 거목은 마을의 정신적인 지주였고, 제사를 지내는 터
버드나무 노거수 삼례읍 하리 용전마을에는 버드나무 노거수가 있다. 노거수란 어른 가슴높이의 나무 둘레가 3m 이상이고 수령이 200년 이상인 오래된 커다란 나무를 가리킨다. 원래 버드나무가 있는 땅은 사유지인데 땅 주인이 버드나무는 마을 공동의 것이라며 버드나무가 있는 땅을 남겨 놓고 울타리를 둘렀다. 이래서 아직 우리 사회는 살만한 곳이다. 우리나라의 버드나무는 주로 왕버들, 능수버들, 수양버들이다. 버드나무 껍질에는 아스피린을 만드는 살리실산이라는 화학물질이 들어 있다. 아스피린으로 유명한 제약회사 바이엘에서 세계 여러 나라의 버드나무에서 살리실산을 추출하여 실험해 본 결과 우리나라의 버드나무에서 추출된 살리실산의 효능이 가장 좋았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이순신 장군이 무과 시험 중 말에서 떨어졌을 때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다리를 묶었고, 그 옛날 진통제가 없던 시절 아이를 낳을 때 산모는 입에 버드나무 가지를 물었다고 한다. 식사 후에 우리는 양치질을 한다. 양치질의 ‘양치(養齒)’는 버드나무 가지를 뜻하는 ‘양지(楊枝)’에서 왔다. 가지 지(枝) 자가 발음이 비슷한 이 치(齒)자로 대치되며 양치질이 된 것이다. 오래된 옛날의 칫솔은 버드나무 등으로 만든
구와리 후와마을 완주군 삼례읍 구와리는 오래된 와리라는 뜻이다. 지명이 와리인 경우는 보통 마을에 기와를 굽는 곳이 있었다. 그런데 구와리에서는 기와를 굽던 가마에 대한 기억이 있는 주민을 만날 수 없었다. 오래전 일이라 전승이 안 된 것인지 기와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동네에 기와집이 많아 와리라고 불렸을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구와리는 집성촌으로 후와에는 전주이씨가 전와와 유리에는 전주류씨가 살고 있으며, 사람은 ‘이씨’가 재산은 ‘류씨’가 낫다는 말이 있다. 후와는 뒤쪽에 있는 와리라는 뜻으로 수로가 마을을 지난다. 만경강 개수공사 전에는 뒷내라고 부르던 개울이다. 오래전 구와리와 하리는 만경강 가운데 있던 섬이었다. 앞에 흐르는 만경강을 앞내, 뒤에 흐르는 강을 뒷내라고 불렀다. 비가 많이 오면 홍수로 늘 피해를 보던 지역이었지만, 만경강의 직강화 공사로 강이 나뉘면서 뒷내는 둔내라고 불리는 현재의 인공수로가 되었다. 토관을 넣지 않은 마을 쪽 냇가는 왜가리를 비롯한 철새들이 먹이를 찾아 날아오고 있어 근처 학교 아이들에게는 좋은 생태교육장이 될 수 있다. <후와마을 괴정> 후와마을 중앙에는 오래된
※ 이 글은 지난 2021년 12월 7일 "삼례의 잊혀진 독립운동가 김춘배 의사" 포럼에서 황수근 평택문화원 학예연구사가 발표한 <김춘배의 함남권총의거>를 전재한 것입니다. 김춘배 의사의 손자 김경근 목사는 이제껏 국가보훈처의 기록을 따랐으나 새로 찾은 제적등본에 따라 김춘배가 삼례출신임을 증명하였으며 생몰연월일이 1906년 2월 29일~1942년 7월 8일이라고 정정하여 밝혔다. 머리말 김춘배(金春培)는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 삼례리 출신으로 유년 시절 간도로 이주 후에 1927년 정의부 의용군으로 간도일대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였으며 1934년에는 함남권총의거를 실행한 인물이다. 전북 전주군 삼례면 삼례리(현 완주군 삼례읍 삼례리)에서 태어난 김춘배는 기독교계열의 영신학교에서 근대교육을 받았으며, 일제의 횡포와 착취를 피해 가족과 함께 간도로 이주하였다. 간도에서 정의부에 가담하여 당시 인근 부호에게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였으며, 이로 인해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그리고 청진형무소에서 탈출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김춘배는 1934년 출옥 후에 단독으로 함경남도 북청군 신창주재소에서 총기와 실탄을 탈취했으며, 이 총기를 사용해서 군자금을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