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이 많아 얻은 지명, 어전리의 근현대 100년사 2

어전리 거부 도씨들을 찾아서

 

4. 어전리 거부 도씨(都氏)들의 행적

 

 

1) 전익수리조합과 어전리 도씨 일가

 

필자는 어전리 마을조사를 하면서 제보자 정관옥(80세, 1942년생)으로부터 두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하나는 “이 마을이 옛날에는 ‘도’씨들이 많았는데, 거부로 살았다. 지금은 한 사람도 안 산다. 후손이 어디에 사는지는 모른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이 마을에 ‘이엽사농장’이 있었고, 농장이 대간선 제방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엽사농장(二葉社農場)은 일본 니가타현 출신 자본가인 시라세(白勢春三)와 시라세이(白勢量作)가 1926년에 설립한 전형적인 식민농업회사로서 본점을 전주에 두었다. 1927년경 이엽사는 전주의 삼례농장, 익산군의 황등농장, 옥구군의 서수농장 등 세 개의 농장에 총 1,200정보(논 1,000정보, 밭 200정보)의 땅을 확보하고, 이를 1,700여 명의 한국 소작인들에게 경작시키고 있었다. 이엽사의 삼례농장과 관련된 사무실겸 창고가 어전리에 있었다는 것이다.

 

‘도씨’(都氏)를 찾아 나섰다. 우연치 않게 자료에서 어전리 도(都) 씨들을 발견하였다. 『전북농조80년사』의 <全益수리조합> 항목에서 都씨들이 무더기로 등장했다. <전익수리조합>은 「만경강개수공사」 편에서 자세히 고찰했듯이, 삼례평야를 몽리구역으로 설립된 조합이다. 조합 설립 발기인들은 제일 먼저 민영익 소유의 ‘독주항’을 매수하였는데, 이들은 구로다(黑田二平), 백남신, 고지마(兒島大吉), 박기순, 이마무라(今村一太郞), 박영근 등 총 6인이었다. 이들이 인가신청을 내 1910년에 설립인가를 받은 조합이 <전익수리조합>이다. 해당 몽리구역으로는 당시 전주군 우서면(紆西面)에 속했던, 후상리, 후정리, 해전리, 어전리, 문종리를 비롯하여 익산군 춘포면(사천리, 장연리, 판문리, 신호리, 회화리, 덕실리, 시전리, 불당리), 익산군 동일면(대장촌 신월리, 신평리, 구담리, 구복리, 간리) 등이었다. 조합 사무실은 대장촌에 두었다.

 

 

전익수리조합은 창설초 조합원수가 75명이고, 초대 조합장은 구로다(黑田二平)였으며, 조합원 총회에서 10명의 평의원이 선출되었다. 이 가운데 5명이 조선인이었는데, 그 중 한 명이 ‘도덕호’(都德好)였다. 평의원으로 今村一次郞(춘포면 대장촌), 島本史一(춘포면 대장촌), 細川隆恒(춘포면 대장촌), 兒島大吉(춘포면 사천리), 下山時彦(조촌면 동산촌), 白南信(전주부 西二契), 朴基順(전주부 西四契), 金允甫(춘포면 쌍정리), 洪士聖(춘포면 신호리), 그리고 都德好(춘포면 어전리)였다.

한편 1913년 9월 20일, 대장촌 공립심상소학교에서 전익수리조합원 총회가 열린다. 이 시점에 조합원은 총원이 210명으로 3년 사이에 세 배 가까이 폭증하였다, 이날 총회에서 어전리 도덕호는 평의원 10명 중 한 명으로 중임(重任)되었다. 1913년 총회 시점에서 어전리는 조합원이 4명인데 모두 都씨뿐이다. 당시 명단과 경작지 규모는 아래 <표1>과 같다.

 

 

 

2) 삼례 어전리 都씨 후손, 도정회(86세, 1936년생)

 

도정회는 위 <표1>에서 도경환의 직계 손자이다. 그가 후정리에 살았다는 제보를 받았고, 후상 마을 이갑룡 이장을 통해서 연락처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는 현재 삼례리 한내 주공아파트에 거주한다. 그를 통해 위 <표1>에 등장하는 인물 간의 관계를 알아보았다.

위 <표1>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한 도경환(108두락)은 그의 직계 조부이다. 전익수리조합의 초대와 2대 평의원을 지낸 도덕호(족보명 俊相, 1862년생)는 도경환(족보명 寅煥, 1881~1928)의 부친이다. 그러니까 도덕호와 도경환은 부자관계이고, 도정회 기준으로 도덕호는 증조부가 된다. <표1>에서 28두락을 소유한 도운택(云澤)은 덕호의 형제로 보이는데, 호적상에는 云宅(1881~1923)으로 표기되어 있다, 위 명단 중에 13두락을 소유한 도덕삼(德三)만 촌수를 확인할 수 없었다. 항렬만으로는 도정회의 증조부인 도덕호의 형제로 보인다.

 

성주 도씨가 어전리 땅에 첫 입향한 분은 누구일까, 또 어디에서일까? 이에 대해서 도정회는 증조대에 들어왔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증조라면 앞에서 거론된 사람 중에 도덕호이다. 도덕호라고 한다면 1913년 당시 재산이 2두락으로 가장 적다. 만약 그렇다면 많은 재산을 형성한 분은 그의 아들인 도경환이 된다. 아무리 자수성가해도 그렇지, 도경환이 그 많은 자산을 당대에 어떻게 형성할 수 있었을까. 다른 추론이 필요한 듯하다.

성주 도씨가 어전리로 입향하기 전에는 춘포면 갈리에서 살았다고 한다. 갈리가 성주도씨 집성촌이라고 한다. 갈리는 익산군 동일면 지역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대장촌, 신월리, 신평리, 구담리, 구복리, 간리가 다 동일면 지역을 이루었다. 당시 <전익수리조합> 구역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어전리는 전주군 우서면 지역이었고, 간리는 익산군 동일면 지역으로, 전익수리조합의 관개(灌漑)를 받는 몽리구역이었다.

 

도정회의 부친은 도기태(基泰)이다. 조부 ‘경환’이 네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각각 기섭, 기태, 기철, 기완이다. 큰아들 기섭은 일본에 유학하였다. 귀국 후 전주역에서 화물을 관장하는 통운(通運) 소장을 역임하였다. 둘째부터 넷째까지는 어전리에 거주하였다. 가업은 둘째 아들이자 도정회의 부친 도기태가 이었다. 셋째와 넷째 아들은 건강이 좋지 않아 젊어서 일찍 작고하였다. 도정회 기억으로 부친 도기태의 농지는 ‘한 50마지기’ 정도였을 거라고 한다. 이 기억이 맞다면 도씨 일가의 재산치고는 의외로 적은 규모이다. 1950년에 시행된 농지개혁과 관련이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의 부친은 59세 때 작고하였다. 그때가 도정회가 군대 제대하던 해이고, 그가 스물네 살이었을 때라고 한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부친 도기태의 출생은 1900년 무렵이고, 작고한 해는 1960년 전후이다. 조부님의 토지재산은 누가 이어받았을까?

 

“할아버지 재산은 우리 아버지한테 대부분 왔어요. 할아버지는 논이 많아서 도지도 많이 받았어요. 천석꾼이네 어쩌네 한 것 같애요. 큰아들(기섭)은 일본유학하고, 직장도 좋으니까 재산을 안 주었고, 셋째와 넷째 아들은 일찍 작고하셨고,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한테 대부분 왔을 거요. 그래봐야 한 50마지기밖에 안 되는 걸로 알아요. 그마저도 내가 군대갔다 오니까 집 한 채만 남을 정도로 다 없어졌어요.”

 

과거에는 농촌의 토지자산가들이 농지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이유야 저마다 다르겠지만 듣는 이야기로는 ‘빚보증’에 의한 파산이 빈도수로 가장 많은 것 같다. 도정회의 부친도 이 경우에 해당되었다. 친척에게 보증을 서줬는데 결국 그 빚을 다 떠맡았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부친의 교육열이 남달라서 8남매를 가르치는 과정에서 재산이 줄었다고 한다. 도정회는 본인이 고등학교까지 교육받은 것이 ‘유산이라면 유산’이라고 말한다.

 

“해방되고 나서는 보증을 많이 서줬어요. 친척이 복덕방을 하는데 거기 보증 서줬다가 논 다 팔아서 빚 갚았어요. 그때는 논이 참 쌌어요. 머슴 2년 살면 논 샀어요. 어전에도 머슴 살아서 부자된 사람이 둘이나 있어요. 또 아버지가 아들 넷, 딸 넷을 두셨는데 6명을 갈쳤어요. 중고, 대학교까지 갈쳤어요. 그러느라고 재산을 탕진해 버렸어요.”

 

도정회 부친 도기태는 일제강점기에 마을 구장이었다. 해방이 되자 남로당을 비롯하여 지하활동에 머물던 좌익계가 대거 합법공간에서 공개적인 정치활동을 개시한다. 이때 대지주나 구장 등은 좌익들의 일시적인 타겟이 되었다.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또다시 불법단체로 탄압을 받게 된 좌익계열은 6・25가 발발하면서 이념전쟁의 한 주체가 되었다. 동네 구장을 맡았던 도정회의 부친 도기태는 무사하였을까.

 

“6・25가 왔다 그 말여. 왜정 때 구장 한 사람들이 해방 후에는 탄압을 받았잖아요. 친일파라고 해서. 해방 후에 공산당이 얼마나 심했어요. 동네에서 잡아다 때리고 그랬어요. 해방 후에. 왜정 때 구장을 했어도 우리 아버지는 아무 탈이 없었어요. 없는 사람들 다 도와줘서 매 한 번 안 맞았어요. 6・25 때 무사히 지낸 것은 인심을 얻었기 때문이에요. 그 덕에 면의원도 했고요. 우리 큰형님도 삼례면사무소 재무과장 하다가, 여중학교 서무과장 하다가 면의원 했습니다. 근데 병이 깊어져서 40대에 일찍 돌아가셨어요.”

 

도정회의 부친은 1952년에 시행된 제1차 지방선거에 출마해 삼례면 면의원에 당선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선 지방의회 의원선거가 6·25 전쟁 중에 실시된다. 그러한 까닭에 38선 이북지역, 미수복지역, 치안상태가 불안한 지역을 제외한 채 선거가 실시되었다. 4월에는 시·읍·면의회 의원을 선출하였고, 5월에는 서울·경기·강원을 제외한 지역에서 도의원을 선출하였다. 당시 완주군에서 당선된 민선1기 면의원 당선자는 다음과 같았다.

 

▲ 1952년 민선1기 삼례 면의원 당선자

윤석동(尹錫東), 김수철(金守哲), 황인상(黃仁祥), 이덕엽(李德燁), 이행용(李行鏞), 이 빈(李 빈), 황희용(黃喜用), 이문백(李文伯), 류동수(柳東秀), 임대석(林大錫), 이인교(李仁敎), 박원형(朴元亨), 도기태(都基泰), 김남종(金南鍾)

 

 

3) 만경강에서 골재채취한 청년사업가 도정회

 

도정회는 스물넷에 군을 제대했고, 스물다섯 살 때 ‘대림산업’에 취업했다. 1959년도이다. 전주공고를 졸업한 상태라 취업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대림산업이 전주에 출장소를 두고 삼례배수문 공사를 하고 있던 때다. 도정회가 취업 후 투입된 곳이 삼례배수문 공사현장이었다.

 

“한내다리 밑에 배수문 놓을 때 내가 가서 일했습니다. 공사를 대림에서 했습니다. 현재 삼례에서 생활오수나 빗물이 내려오는 수문이 한내배수문이에요. 삼례는 지대가 낮아서 비가 조금만 와도 침수되잖아요. 그 옆에는 일제 때 만든 수문이 있어요. 그 수문은 삼례보에서 물을 비비정으로 공급하는 수문입니다. 장마철에는 차단합니다. 그것도 그때 철거하고 다시 놓았어요. 지금 수문이 그때 놓은 겁니다. 언젠가 수문은 그때 그대로인데 물문 여닫는 기계만 새로 설치했더라고요. 한내다리(삼례교)도 대림에서 놓았어요.”

 

삼례배수문과 함께 병행한 공사가 있었다. 만경강 제방공사였다. 일제강점기 때 다 완성한 제방인데 어디를 했단 말인가? 해방 후에 터진 제방이라도 있단 말인가? 어찌된 일인지 삼례제방은 일부 구간이 완성되지 못하였다. 일제 때도 누락되었고, 해방 후에도 그대로 방치되었다. 삼례배수문에서 하리 쪽의 제방이다. 50여 미터가 제방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이곳 때문에 하리 학생들은 수업 중에 비만 내리면 일찍 하교를 시켰다. 이곳을 건너야 귀가하는 학생들이라 물이 넘치기 전에 조퇴를 시키는 것이다. 하리 사람들은 삼례장을 보더라도 이곳을 건너야 했다. 필자는 하리 마을조사 때, 이 구간 공사를 언제 했는지를 놓고 주민들 간에 갑론을박한 것을 기억한다. 우연치 않게 당시 공사현장에 근무하던 도정회로부터 알게 된 것이다. 가외의 소득이었다.

 

 

 

“한내 배수문에서 하리 쪽으로 제방이 없었어요. 제방 일부가 없어서 비만 오면 안좌리에 그냥 쏟아져 들어와요. 내가 있을 때 대림에서 막았습니다. 수문공사, 제방공사를 같이 했어요. 포크레인도 없을 때입니다. 지게로 만보질하고, 네루(레일) 깔고 토차로 토사 실어나르면서 막았어요. 물문에서 한 100미터 정도 위로 가면 제방이 50미터 이상 없었어요. 안 막았어요. 하리 사람들도 비면 학교를 못 가요. 거기를 막으면서부터 안좌리도 하리도 좋아졌어요. 다 논으로 개답을 했으니까. 그때가 박정희 때가 아니고 자유당 때일거요.”

 

그런데 도정회는 대림산업에서 1년 남짓 근무하고 그만두었다. 대림산업 취업 때 신분은 임시직이었다. 회사에서는 대전으로 가자고 했다. 대전출장소로 가서 1년만 더 근무하면 정식 직원이 될 수 있다며 권유하였다. 그는 퇴직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비비정에서 골재사업을 시작하였다. 삼례 배수문공사나 제방공사 때 보니까 하천에 지천으로 깔린 모래자갈을 아무 비용 없이 채취해 공사에 투입하는 것을 보고, 또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건설현장에서 골재의 중요성과 수요 가능성을 경험한 바여서 골재사업을 구상한 것이다.

 

“스물 예닐곱 살에 골재사업을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어전리를 떠나 비비정에서 방 얻어서 살았습니다. 한 10년 정도 될 겁니다. 골재채취는 비비정보다 하리가 많았어요. 주로 그쪽에서 채취하고, 일꾼들은 비비정 사람들이었어요. 내가 인부들 시켜서 골재를 채취해 놓으면 업자들이 트럭을 몰고 사러 옵니다. 그러면 또 비비정 사람들이 상차해요.”

 

골재채취는 반드시 군청에서 허가를 받아야 했다. 그가 공고 졸업한 덕을 이때 많이 봤다고 한다. 허가증은 군청 건설과 소관 업무인데, 건설과 담당직원들이 거의 공고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허가증을 받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고등학교 선배들이 많이 배려해 줘서 10여 년 동안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가 1960년대 초반이니까 산업화 훨씬 이전 시기였다. 당시 골재는 전부 익산으로 팔려갔다고 한다. 익산에도 아직 공단이 설립되기 이전이다. 주로 상하수도, 주택, 건물 공사장으로 실려 갔다. 하리나 신탁리 앞에서 채취한 골재를 실은 트럭은 제방을 타고 내려와, 국도1호선 도로를 겸했던 삼례보를 건너고 비비정과 대장촌을 지나 익산으로 향했다.

그는 비비정 마을과 인연이 깊다. 총각으로 골재사업을 하고 있으니까 비비정 사람들이 상차하러 다니면서, “비비정에 이쁘고 얌전한 색시감이 있으니 한번 만나 보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는 비비정에 아예 방을 얻어서 사업하는 동안 기거하였다. 결국 지금의 부인을 만나게 되었다.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 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결혼은 1968년 1월, 그의 나이 서른두 살 때였다. 골재사업을 계속하였다. 당시에는 인건비가 박하기 짝이 없었다. 또 청년시절에 사업을 했기 때문에 세상 물정도 잘 몰랐다고 한다.

 

“비비정 사람들이 참 어렵게 살았어요. 내가 거기서 사업하는 동안 내 전표로 먹고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없는 사람들 구휼을 한 셈이지요. 1960년대에 내 전표 가져가면 쌀도 주고 술도 주고 그랬어요. 심지어 당장 돈이 급한 사람들은 나한테 받은 전표를 깡을 해서 팔았어요. 가령 1000원이면 900원에 팔아요. 내 전표를 사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골재 업자들이 골재를 사갈 때 외상이나 어음을 끊어요. 그러니까 나도 어쩔 수 없이 인부들에게 현찰을 못 주고 전표를 끊어줍니다. 나중에 내가 돈을 벌면서는 전표 없애고 현찰로 줬어요. 그런데 그때는 인건비가 형편없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내가 골재값을 더 받고 인건비를 더 줬어야 하는데, 내가 너무 어려서 골재사업을 시작했어요. 골재값이 적정가격이 없잖아요. 내가 받고 싶은대로 받았으니까.”

 

 

어쨌거나 그는 골재사업으로 젊어서 돈을 벌었다. 그 당시 농촌의 현실은 “호미자루 내던지고 서울가는 12열차 타던 시절”이라고 한다. 이농현상이 시작될 무렵이다. 그도 다른 사업을 구상하였다. 운수사업은 구체적인 검토까지 하였다. 그럴 때마다 장모가 하는 말이 있었다. “돈은 땅에 묻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두 눈 질끈 감고 논을 샀다. 논은 쌌다. 일제강점기 거부의 손자였으나 아버지 대에 다 상실한 농지에 대한 미련이었을까. 후정리에 농지를 장만하고 후상 마을에서 농민으로 살아왔다. 이 글 첫머리에서 언급한 ‘후상에 살았던 도씨 찾기’는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4) 에필로그, 부인 한옥주가 비비정에서 만난 6・25

 

도정회가 비비정에서 만난 부인은 한옥주다. 한옥주는 비비정이 고향이고 친정이다. 친정아버지가 안좌리에서 비비정으로 이주하였다. 6・25 때 아장아장 걷는 나이였다. 살던 집은 비비정 물문(도수로 터널) 아래 외딴집이었다. 전라선 만경철교를 폭파하려고 미군비행기가 폭격과 기총소사를 하였다. 철교는 멀쩡히 살아남았지만 주민들은 끔찍한 살육을 당했다.

 

“나는 토방 아래 마당에서 공깃돌로 손꼽장난하고 있었어요. 동네에서 이모라고 부르던 양반이 저를 막 불러요. ‘순예야, 순예야 감자 쪄놨응게 먹게 오니라!’ 해요. 그때 아장아장 이모한테 걸어가서 살았어요. 그 자리 있었으면 널러가 버렸을 거요. 감자 먹겠다고 몇 걸음 걸어가서 살았당게. 그때 우리집 옆방에 세 들어서 살던 사람은 그 자리에서 죽었어요, 포탄 맞아서. 우리 친정어머니는 마루에서 발 내딛는 순간 폭탄이 떨어져갖고 얼굴이 한쪽 께끼고 팔다리가 패이고 그랬어요. 죽을라다 살았당게. 친정아버지는 안좌리 논에 가는데 비료를 가지고 갔어야 하는데, 가서 봉게 소금을 가져왔더래요. 그때 얼마나 놀랐으면 그랬겠어요.”

 

 

김성식 박사(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 특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