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 사전 10

가방

[명사] 물건을 넣어 들거나 메고 다닐 수 있게 만든 용구. 가죽이나 천, 비닐 따위로 만든다.

 

어머니의 커다란 가방은 콜드크림, 양담배, 파인애플 깡통을 비롯해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물건들로 가득했다. 그 무겁고 무거운 가방에 내 손 하나가 더 매달려 있었다. 미제 물건과 어린 아들을 담은 가방. 버스 차비가 아까웠던 어머니는 길고 긴 길을 무거운 가방을 들고 걸어 다니셨다. 힘들어도 혹은 어린 아들이 떼를 써도 삶의 무게 때문이었는지 어머니는 ‘무겁다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으셨다. 그래도 장사가 잘된 날이면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파인애플 깡통을 까주셨다. 가방엔 맛있는 파인애플이 살고 있다고 믿었다. 가방에 대한 첫 기억.

 

기억 속 두 번째 가방 역시 어머니 가방이다. 까만 가죽을 뒤집어쓴 가방 속엔 화창한 웃음이 새겨진 안내 책자들이 수북했다. 행복설계, 은퇴 설계, 건강 설계 등. 수많은 보험 안내 책자 속에는 왜 그리 웃는 사람들이 많았던지. 보험 안내 책자로 딱지를 접을 때마다 웃는 사람들의 고른 이빨이 딱지 앞에 나오도록 접었다. 가죽 가방 속엔 행복한 웃음이 살았으므로 나도, 어머니도 행복한 척해야 했다. 어머니의 까만 인조가죽 가방은 결국 해졌다. 가방에 대한 두 번째 기억.

 

초등학교 2학년 무렵 학교 앞에 오락실이 등장했다. 50원을 넣으면 킹콩이 던지는 공을 피해 공주를 구하거나 비행기를 조종해 적을 소탕할 수 있었다. 학교가 파하면 어김없이 오락기 위에 가방을 올려놓고 100원어치 오락을 했다. 오락을 하는 동안 제일 좋아하는 야구도 잊었고, 숙제도 잊었다. 오락을 잘하는 친구가 신기록 세우는 걸 보려고 친구 옆에 앉아 넋 놓고 구경도 했다.

 

하루는 집에 도착하여 가방을 열자 그 안에 내 것이 아닌 것들이 가득했다. 다른 학교 학생의 가방이었다. 들른 곳은 오락실뿐이었으니 오락실에서 가방이 바뀐 것이었다. 여차여차하여 가방이 바뀐 집을 찾아가 그 집 아이의 아버님 앞에 앉게 되었다. 아버님께서는 가방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꼬치꼬치 물으셨다. 나나 그 친구나 마치 입을 맞춘 듯 운동장에서 바뀌었다 했다. 가방 안에는 가끔 거짓말도 산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나는 첫사랑앓이가 심했다. 버스 손잡이에도, 교과서 글씨 속에서도 그녀는 수시로 웃고 있는 듯했다. 지나다 까치 울음소리라도 들리면 그녀가 어디선가 나타날 것만 같았다. 그 덕에 나는 틈만 나면 연서를 썼다. 영어 단어를 외우며 깜지를 쓰다가도 썼고, 수학 공식 사이에도 연서를 썼다. 하지만 수줍음 많은 탓일까? 그녀 앞에만 서면 더 개구쟁이처럼 굴었다. 좋아하는 내색도 안 했고,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작정을 하고 편지를 건넸다. 그러곤 두세 달 동안 그녀 앞에 나서지 않았다. 계속 쓰여진 연서는 가방 속에 차곡차곡 담겼다. 사춘기 가방 속엔 말랑말랑한 첫사랑이 살았다.

 

내 기억 속 가방엔 다양한 것들이 산다. 물론 지금도 다양한 것들이 살고 있다. 그렇다고 노트 혹은 책, 볼펜들이 산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사상이 들어와 잠시 세 들기도 하고, 때론 사회적 울분이 도사린 채 엉엉 울기도 한다. 함박웃음이 들어와 살기도 하고, 통속적인 사랑이 몸을 맡기기도 한다. 하지만 가방이 이 모든 걸 허락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가방 제 스스로 주인인 내가 이루는 관계들을 바라보다 그 무엇인가를 잠시 살도록 하는 건 아닐까?

 

나 혹은 너의 가방 속엔 지금 무엇이 살고 있을까?

 

김성철 시인

시집 『달이 기우는 비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