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 사전 11

 

봄맞이 [명사]

 

1. 봄을 맞는 일. 또는 봄을 맞아서 베푸는 놀이.

원숭이 똥구멍은 빨개, 빨개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빠나나

빠나나는 길어, 길으면 기차

대여섯 살의 나는 어디서 배웠는지 원숭이 똥꾸멍 노래를 잘 따라 불렀었지. 똥꾸멍을 똥꾸녁이라 했던가? 아니면 빨개를 빨가라고 했었던가?

 

그러고 보면 기억은 늘 쉽게 변질된다. 옛 기억들이 내 몸에 맞게 체형을 바꾸거나 답답한 생활 속에서 왜곡되는 일들은 얼마나 많은가.

 

역사(驛舍)만 남은 춘포역으로 향한다. 봄춘(春)에 개 포(浦), 우리말로 하면 봄개고, 봄나루인 춘포. 봄개, 봄나루 얼마나 예쁜 이름이던가. 지독한 한파에서 벗어나 봄을 맞기에 이만한 지명이 또 있을까? 사랑하는 당신이 있다면 당신을 봄나루라 부르고 싶은.

 

나를 놓고 떠나는 111번 버스가 날린 먼지가 채 가라앉기도 전 춘포면내를 둘러본다. 60년대 혹은 70년대가 고스란히 앉아있는 듯한 풍광. 웅크린 어깨를 가진 단층 건물들과 낡은 입간판들이 나를 순식간에 아날로그 세상으로 옮겨놓았다. 짧은 여행은 시공간을 넘나든다.

 

춘포역으로 향하는 골목으로 들어서자 패망한 일본인들이 남겨놓은 듯한 적산가옥들이 눈에 띄었다. 색 바라고 무너져가고 있는 담벼락들. 담벼락들 사이로 춘포의 옛 사진들이 걸려 있고 그 위로 길고양이들이 우르르 몰려다녔다. 춘포 일대의 토지를 소유했던 일본인 대지주 호소가와 모리다치(1883~1970)처럼 발톱을 세운 길고양이들.

 

춘포는 호소가와를 빼놓고 이야기될 수 없다. 엄청난 규모의 도정공장을 세웠고, 도정공장을 통해 가공한 현미만을 일본으로 가져갔다던 그. 춘포에서 생산된 어마어마한 현미를 쉽게 운반하기 위해 춘포역을 만들었기에 춘포는 호소가와의 작품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지명 또한 호소가와의 등장으로 봄나루 그리고 춘포에서 큰 대(大) 마당 장(場)을 써 대장촌으로 개명하지 않았던가.

 

춘포역 광장으로 들어서자 책을 엎어놓은 듯한 춘포역사가 한눈에 들어왔다. 겨우내 한기를 고스란히 짊어진 푸른 지붕에서 오래 묵은 기적소리가 묻어나올 듯하고, 역사의 문을 열면 왁자지껄한 사투리가 묻어나올 것 같은. 그와 동시에 지금껏 아픈 역사(歷史)를 지닌 낡은 역.

 

군산의 임피역사와 함께 옛 역사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100살 넘은 춘포역은 1996년까지 대장역으로 불렸다가 춘포역으로 개칭되었다. 슬레이트를 얹어 놓아 마치 책을 엎어놓은 듯한 박공지붕을 지녔으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이자 건축적, 철도사적으로 가치가 큰 춘포역.

 

철길과 마주보는 춘포역을 보고 싶었으나 전라선 복선화사업으로 인하여 철길은 사라지고 없다. 철길을 대신한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들이 오래된 춘포역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마치 주인들을 제치고 주인이 되었던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처럼 주인 행색을 하고 있는 꼴이랄까?

 

역사를 돌며 꼼꼼히 1914년 봄나루역을 만지고 느낀다. 한파는 물러갔고 소용돌이치는 역사 속 한가운데 서 있는 듯한 봄나루. 겨우내 매달렸던 한기와 폭설이 패망한 일본처럼 도망가고 지붕엔 봄을 부르는 햇살이 통통 뛰노는. 옛 지명처럼 봄물을 끊임없이 길어 올리는 춘포역. 춘포역은 그렇게 또 한 살을 먹고 당신과 나처럼 낡아가고 있었다.

김성철

시인. 시집 『달이 기우는 비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