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천수와 조수의 조우(遭遇) 현장, 해전(海田) 마을사 (1)

1. 지리적 특성
2. 원제방과 신제방
3. ‘내가 태어나던 해(1937년)에 모래로 쌓았다’는 신제방

1. 지리적 특성

 

해전은 지명에서부터 물과 관련이 깊다. 조수가 들어오던 마을임을 직감할 수 있다. 만경강 상류에서 내려오는 강물과 서해에서 올라오는 조수(潮水)가 드나들며 형성된 충적층이 들판이 되고, 사구가 형성된 지대에 촌락이 들어선다. 해전뜰과 해전마을의 이력이 그러하다. 해전은 하천수보다 조수가 우세해서 얻은 지명이다. 한편 만경강은 해전부터 백사장이 형성된다. 이때는 조수보다 하천이 우세한 현상이다. 만경강이 고산천 상류로부터 거세게 내려오다가 해전 앞에 이르러 강을 이루며 순해진다. 상류로부터 모래를 몰고와 백사장을 이루고, 하류로부터는 조수가 미립자를 밀고와 하천부지를 마련하였다. 해전 앞은 넓은 하천부지와 명사십리를 방불케하는 백사장이 동시에 병존하는 곳이다.

 

 

해전 마을 토질은 비비정 동쪽, 즉 하리나 와리, 신탁리 등과 다르다. ‘동부리’는 사질토가 우세한 반면에 ‘서부리’는 점질양토(粘質壤土)가 우세하다.1) 따라서 서부리는 동부리에 비해 표토가 깊으면서도 점토 성분이 많아 유기질이 풍부하다. 점질양토는 배수도 잘 된다. 동부리 땅은 사석토여서 배수가 헤플 정도로 잘 된다. 논물이 머물지 않고 쉽게 빠져나간다. 문제는 논에 물이 머물러있어야 하는 시기조차 물이 빠져버리는 데에 있다. 그래서 쌀이 찰지지 못하고 가볍다. 해전마을 점질토는 표토가 상대적으로 깊어서 논물이 오래 머물 수 있다. 벼가 수분을 충분히 흡수하는 것이다. 논물이 머문 만큼 쌀은 찰지고 단단해진다.

 

“여기는 2~3미터만 파도 뻘, 자갈이에요. 아주 옛날에는 여기가 갯벌지역이었어요. 토양은 지들(질땅)과 사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점질양토라는 게 있거든요. 여기가 점질양토 땅입니다.”2)

 

 

2. 원제방과 신제방

 

 

<그림 2>는 구한말 시기에 작성된 해전리 일대 지도이다. 이 지도에서 ‘海田里’라고 쓰인 지명 끝에 지네발처럼 횡으로 가로지르는 표식이 보인다. 이 표식은 ‘토위’(土圍)라고 하는 제방을 말한다. 그러니까 일제강점기에 축조된 근대식 제방이 아닌 재래식 제방이다. 그 아래 갈 지(之) 자로 그려진 굵은 실선이 만경강 본류이다. 지도에서 만경강 본류 일부구간, 즉 비비정에서 해전리 앞까지는 재래식 제방표식이 보인다.

해전리 마을 발밑으로 흐르는 소위 ‘앞강’은, 우측으로 보면 비비정 수도산 뒤쪽에서 들어오는 수로에서 시작되어 해전리로 들어온다. 또 마천 협곡을 빠져나온 하천에서 해전 쪽으로 들어오는 수로가 한 줄이 실선으로 그려져 있다. 이 수로가 앞냇갈의 원천인지, 비비정 뒤쪽에서 들어오는 수로가 원천인지는 알 수 없다. 두 물줄기가 합수된 이후에 해전마을 앞냇갈로 들어오는 것은 틀림없다. 해전리 앞냇갈은 사천(沙川)에서 만경강 본류와 합수되고 있다.

 

“옛날에는 마을 앞으로가 하천부지였어요. 앞냇갈, 뒷냇갈이라고 했어요. 앞냇갈은 고산천 본류 말고 마을 앞으로 흐르던 냇갈이에요. 지도상의 표시는 원제방 표시에요. 만경강 제방 축조 전에 원제방이 있었어요. 왜정 때 제방을 쌓은 후에는 원제방자리에다 집 짓고 살아요. 거기가 지대가 높으니까. 우리 동네가 본래는 만경강 제방 축조 후에 원제방 위에 집 짓고 살았어요. 방천 위에다 집을 짓고 산 거에요.”

 

즉, 위 지도처럼 해전리 앞으로는 만경강 본류 말고도 하천이 흘렀다. 만경강 본류는 제방이 없었지만 ‘앞냇갈’이라고 불렀던 하천에는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서 제방이 쌓였었다. 이러한 재래식 제방을 ‘인가방천’(人家防川)이라고도 한다. 만경강 본류는 농경지보다 낮아서 농업용수로 끌어다 쓸 수 없었다. 그래서 앞냇갈이 농업용수이자 생활용수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만경강 상류부터 제방이 축조되면서 고산천에서 앞냇갈로 유입되던 하천수도 줄거나 차단된다. 또 근대식 제방이 축조되자 앞냇갈이 범람하는 일이 원천적으로 해소되었다. 제방이 신축되면서 해전마을 취락구조도 변화가 일어난다. 앞냇갈이 하천부지화되자 제방이 있던 높은 지대에도 가옥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이곳을 해전에서는 ‘뙤똥배기’, 혹은 ‘뙤똥집’이라고 하였다.3) 그런 후 앞강 하천부지조차 논으로 개간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물론 앞강 부지 개간 시기도 일제강점기였다.

 

 

두 개의 하천이 흘렀을 당시, 즉 만경강 제방이 축조되기 전에는, 특히 장마철에 홍수로 범람이 빈번하지 않았을까? 재래식 제방만으로 마을이 보호될 수 있었을까? 재래식 제방만 있던 시절에 만경강 범람은 가장 큰 위협요인이었다. 범람과 침수가 상시적으로 일어났다. 다만 그 규모 면에서는 우리가 직간접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과 다르다. 만경강 배후 지형이 지금과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신(新)제방이 없던 시절에는 강건너 동산동, 화전동, 신성리가 여기나 다 한 들판이었어요. 그런게 홍수가 나면 다 같이 물바다요. 그 대신 워낙 넓게 범람하니까 수위가 높지는 않아요. 긍게 지대가 높은 곳은 가볍게 잠길 정도지요. 비가 몽창 와야 담벼락 3분의 1정도 찼다고 하더라고요. 긍게 구제방만 있을 때는 홍수가 잦았어도 물이 넓게 퍼지니까 침수가 되어도 살았다 이 말이요. 농작물이 감소하겠지만 으레 그런 줄 알고 살았던 거지요.”

 

들판이 강남이나 강북이나 하나로 형성되어 있었으니 만경강이 범람해도 강 배후지 사방으로 넓게 퍼지다 보니 피해가 적었다는 말이다. 그러다가 1926년도부터 시작한 만경강개수공사로 강 양쪽에 제방이 축조된 이후는 제방 안으로만 강물이 집중되니까 수위가 높아지기 물살이 거세기 마련이다. 홍수다운 홍수는 오히려 제방축조 이후에 발생하게 된다.

 

 

3. ‘내가 태어나던 해(1937년)에 모래로 쌓았다’는 신제방

 

해전리 앞 신제방은 언제 쌓았을까? 만경강개수공사 기간에 쌓았겠지만 정확한 연도가 궁금하다. 이에 대해서 이석룡 제보자는 다음과 같은 기억을 꺼내놓는다.

 

“우리 할머니가 그러셨어요. ‘너 태어날 때 쌓았다’고. 그 말이 맞다면 비비정에서 대장촌까지 내려가는 제방이 1937년에 쌓은 것이 됩니다. 내 출생년도라서 기억해요. 제방은 삽으로 파다가 지게로만 할 수 없으니까 레일을 놓고 도로꾸에 토사를 싣고 쌓았다고 들었어요.”

 

1937년도의 기억이라면 아마 제방이 완공된 시점일 것이다. 앞에서 항을 달리해서 만경강 개수공사에 대해서 살펴보았듯이 1920년대 이전까지는 만경강 중하류는 홍수 또는 범람이라는 부정적 측면의 대상이었다. 조수가 밀려와 농업용수로 사용할 수도 없었다. 제국주의 일본 자본가들은 강 유역의 습지와 버려진 황무지가 눈에 들어왔다. 강을 개조하면 하천 주변과 배후습지를 농지로 확보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었다. 만경강 개조작업이 본격 착수되었다. 1924년부터 1938년까지 지속된 본류 정비 단계에서의 핵심사업은 양안을 확장한 제방축조였다. 만경강의 곡류천 지형도 완전히 바꾸었다. 이른바 직강화 공사였다.

 

 

만경강 개수공사는 애초 1925년부터 6개년 계획으로 설계하였다. 그러나 정세가 불안하고 경기변화가 심하여 사업기간이 수시로 연장되었다. 첫 번째 예산경정할 시점에는 공사기간을 1925년부터 1936년도까지 12년으로 연장하였다. 1931년에는 긴축예산을 시행함에 따라 예산은 줄이고 기간을 1~2년 연장한다. 1929년 대공황 발발 이후 예산삭감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1933년에도 예산절감 시책으로 1년을 또 연장하게 되고, 1934년도에는 낙동강을 덮친 대홍수가 발생하여 긴급조치로 재차 연장된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만경강개수공사 준공이 당초보다 8년 늦춰진 1938년도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 이전의 수리사업은 해당 수리조합에서 시행한 반면에 ‘만경강개수공사’는 조선총독부 직영사업이었다. 즉 국비를 투입하는 거국적 프로젝트로 추진한 것이다.

제방축조 방식에 관해서도 이석룡은 중요한 진술을 해주었다. 물론 어른들한테 들었다는 전언(傳言)이지만 매우 사실적이다.

 

“이 제방은 흙으로만 쌓은 것이 아니에요. 모래로 쌓았대요. 제방을 모래로 쌓은 이유가 있더라고요. 제방 가운데 핵심에 해당하는 곳은 점질토를 넣고 메로 쳐서 단단하게 박아요. 그리고 양쪽은 전부 모래로 쌓아요. 왜 모래로 쌓냐? 쥐구멍이 나면 구멍을 모래가 메운다 이거요. 제방 양쪽 사면에는 잔디를 입혔어요. 하리 쪽은 해방 후에 쌓은 곳이 있어요. 그때는 흙으로 쌓았어요.”

 

모래제방은 일반적인 제방축조 재질이었던 같다.4) 하천부지 현장에서 재료를 확보하여 축조한다면 그만큼 예산과 공기를 절감할 수 있기에, 만경강도 하천부지의 모래자갈을 이용한 축조방식일 수 있다. 일제시기 발간한 『1935년 조선 직할하천 공사연보』 등 자료를 살펴보면 제방축제 때 사용한 재료는 ‘토량’(土量) 사용량만 입방미터(㎥)로 확인된다. 따라서 모래로 제방을 쌓았다는 구술자 진술이 자료로 확인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마을 주민들한테 복수로 들은 바이고, 각주에서 사례로 든 낙동강 제방도 이 기간에 수행한 사업이라는 점에서 사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제방 중앙에 벽을 쌓아서 방수에 만전을 기하는 것이다. 앞에서 이석룡 씨가 진술한 “제방 가운데 핵에 해당하는 곳에 점질토를 넣고 메로 쳐서” 조성한 장치가 방수벽을 말한다.(<사진 4> 참조)

점질토 중에서도 점도가 가장 높은 흙은 찰진 황토흙이다. 참고로 고산천 최상류에 1922년에 축조한 대아저수지는 콘크리트 댐이다. 반면에 1935년에 축조한 경천저수지는 흙댐이다. 이때도 댐 중앙의 핵심부에는 특별한 재료로 방수벽을 조성해야 했다. 터파기와 말목박기를 마치고 방수벽 조성을 ‘찰진 황토흙’으로 하였다. 완주군 화산면 성북리 황골이라는 곳에서만 있다는 ‘찰진 황토흙’을 이용하기 위해서 레일을 깔고 도로꾸로 운반하였다.

 

 

해전리 앞 제방 조성 당시 황토흙을 사용했는지 하천부지 퇴적층의 개흙을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개흙도 미세한 미립자여서 점도가 높은 흙이다. 어떤 흙을 사용하였든 메로 쳐서 다지는 것은 마찬가지로 중요한 일이다.

일제시기 해전리 앞 제방 규격을 보면 “마답(馬踏, 상단 노면) 7미터, 양 법면(法面, 경사면) 2할 5푼, 제방 내 마답 바로 아래 3미터 위치에 폭 3미터의 소단(小段)을 쌓아 누수를 방지하고, 높이는 계획홍수위보다 1.5~1.8미터의 여유를 두고 비상 홍수에 대비하며, 유로의 굴곡 지역에서는 하천수의 충격부와 체절(締切) 개소에 호안공사를 실시하도록 한다.”는 설계도에 따라 축조하였다.

이럴 경우 제방 경사면은 매우 완만한 형태를 취하게 된다. 제방을 쌓은 재료가 모래라면 경사를 완만히 해야 흘러내리지 않을 것이다. 모래는 현장에서 가장 쉽게 채취할 수 있는 골재이다.

 

“해전 아래쪽 제방은 호안공사까지 했어요. 물이 돌아가는 쪽에 담쌓는 부로꾸(블록)같은 것을 쌓았는데, 그걸 못 빼게 굵은 철삿줄로 단단히 동여맸어요. 우리가 보아서 알아요. 제방 하단부는 부로꾸로 경사면을 상당히 넓게 쌓았어요. 밑변이 4~50미터는 될거요. 우리동네 사람들이 부로꾸 끊어다가 구들장에 쓰고 그랬어요. 속이 꽉찬 통부로꾸라서 돌처럼 무겁고 단단해요. 해전 돌아가는 쪽에 가면 지금도 그게 있을 거요.”

 

제방축조 마지막 작업은 양쪽 사면에 잔디를 입히는 것이었다. 잔디 뿌리가 사면의 흘러내림을 방지할 뿐만 아니라 뿌리가 깊지 않아서 제방에 균열을 낼 염려도 없기 때문이다.

 

“저 어렸을 때만 해도 제방에 소를 못 맸어요. 감시원이 소를 끌고 갈 정도였어요. 그렇게 제방관리를 철저히 했어요. 어른들 말씀 들어보면 제방에다 삽 대고, 낫 대고 했다가는 주재소로 당장 불려갔다고 해요. 제방을 생명선이라고 생각한 거지요. 해방 후에는 제방관리가 엉망진창이었어요. 거의 방치한 상태였어요. 모래도 파먹고, 벨 짓 다 했어요. 터져도 상관없다는 식이었어요. 그때는.”

 

김성식 박사(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 특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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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례 사람들의 삼례 구분용어는 ‘동부리’와 ‘서부리’이다. 삼례 시가지를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을 각각 그렇게 부른다. 일테면 “밥은 서부리 쌀이 맛있고, 체육대회 하면 동부리 사람들이 다 이긴다.”는 식이다.

2) 이석룡(85세. 1937년생). 해전마을의 토질, 수로 등에 대해서 제보해준 분이다. 그는 조사자를 데리고 삼례 일대의 수로에 대해서 현장설명까지 해주었다. 그는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으며, 퇴직 후에도 농사를 지으면서 마을 이장, 해전배수장 관리인 등을 역임하였다. 이 글에서 인용한 발언 가운데 특별히 기명을 밝히지 않은 대목은 모두 이석룡의 제보내용이다.

3) 이석룡은 마을의 역사와 관련하여 중요한 제보를 하였다. 해전마을 위치가 현재 자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본래는 현재 위치에서 동쪽으로 500여 미터에 있었고, 그쪽 지명이 ‘정지미’라고 불렀던 것 같다고 한다. 해전이 현재의 위치로 이주하게 된 계기를 “마을에 나병(한센병)이 퍼진게 환자만 남기고 동네를 비운 채 서쪽으로 이주한 곳이 지금 자리”라고 들었다고 한다.

4) 2020년 대홍수 당시 낙동강, 섬진강 등에서 대홍수가 발생하였는데, 낙동강 제방붕괴 원인에 대한 언론보도(뉴스타파, 2021-04-14)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뉴스타파 취재진이 현지에서 점검한 결과 이번에 붕괴된 낙동강 합천보 상류 제방의 경우 거의 모래로 축조된 제방이었다. 제방의 재질이 모래였다는 사실은 제방 붕괴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 주민 서병화 씨는 뉴스타파에 “모래로 만들어진 제방이라서 불안한 면이 있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주민은 제방이 터지던 날 배수문 구조물이 닿는 부위에서 누수가 생긴 현상을 관찰했다고 말했다. 이 주민도 “제방은 모래로 만들어진 것이다”고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