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천수와 조수의 조우(遭遇) 현장, 해전(海田) 마을사 (4)-끝

8. 하천부지 농경사
9. 해전리 상수도 변천사
10. 에필로그

8. 하천부지 농경사

 

해전리에는 하천부지가 많다. 2014년까지 농사짓던 농경지였다. 당시 ‘4대강사업’과 관련하여 전국적으로 하천부지에서의 농경행위를 일체 금지시키는 바람에 2015년부터는 농사를 못 짓고 재자연화 하게 되었다.

해전마을 하천부지는 제방 안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제방 바깥쪽, 그러니까 제방과 마을 사이에도 하천부지가 존재한다. 삼례 일대에서 하천부지가 가장 넓은 곳이 해전 앞이다. 군산 앞바다 밀물이 밀려들어오는 마지막 구간이 해전이어서 해전 농경지 토양의 심토는 뻘층으로 형성되어 있다. 또 고산천은 상류에서부터 밀고 내려온 모래자갈을 해전까지만 운반해 놓는다. 그래서 해전은 갯벌과 사석이 공존하는 점이지대가 된다.

갯벌과 사석 간에는 시차에 따라 적층시기가 달라진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갯벌이 우세하였다. 비비정까지 조수와 어선이 문제없이 왕래하던 시기까지는 갯벌이 더 밀고 올라다. 제방이 없던 시절이어서 조수가 넓게 퍼진 만큼 갯벌도 넓게 쌓여왔다. 만경강 하구부터 위쪽으로 차츰차츰 갯벌이 퇴적되면서 하상이 높아지고 조수도 약해진다. 조수가 약해질수록 이번에는 고산천 영향이 우세해진다. 갯벌 위에 이번에는 사석이 충적된다. 제방을 쌓은 후로는 상류의 사석이 고산천 제방 안에서만 축적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만경강 중류 이하부터 하천부지가 형성되었다. 봉동 아래로부터도 하천부지에서 경작을 해왔지만 그 구간에서 경작을 한 지는 오래되지 않았다. 자갈이 훨씬 우세했던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해전마을 제방 안쪽 하천부지는 사석땅이다. 모래만 집중적으로 형성된 곳은 일상적으로 물줄기가 흐르는 강심 쪽이다. 그 외의 하천부지는 사석땅이다. 따라서 과거 모래찜을 하던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제방에서부터 강 안쪽으로 형성된 밭지대를 지나야 한다. 밭 끄트머리에부터 백사장이 형성되고, 백사장 끝으로 강물이 흐르는 구조이다.

그런데 사석땅은 해전까지만 형성되었다. 해전 바로 아랫마을인 춘포면 사천부터 판교, 대장촌 등 이하의 하천부지에서는 전부 벼농사를 하였다. 거꾸로 말하자면 하천부지 경작지에 있어서 해전 아래로는 논농사부지이고, 해전까지는 밭농사부지였다.

 

“여기 하천부지는 ‘모래배미’라 물을 대면 금새 빠져버려요. 그래서 나락농사를 지을래야 지을 수가 없어요. 옛날에는 보리농사를 많이 했어요. 보리는 가을에 씨를 뿌려서 이듬해 6월에 타작하잖아요. 그런게 장마를 피하는 곡식이에요. 보리타작 후에는 콩이나 깨를 심었어요.”(이석룡)

 

해전리 하천부지에서 애초에는 곡식이 될만한 밭작물, 즉 호밀, 보리, 밀, 수수 등을 재배하였다. 하천부지 농경에서 가장 큰 위험은 역시 장마철과 늦여름 태풍이다. 하천부지가 물에 잠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름철을 피할 수 있는 작물, 혹은 여름철에 잠기더라도 키가 커서 모가지는 침수를 피할 수 있는 작물을 선택하였다. 그렇다고 여름철을 지나는 작물을 안심은 건 아니다. 콩이나 참깨, 밭벼(山稻) 등을 심었다. 이런 작물은 ‘두고 보는’ 농사였다. 즉 두고 보다가 안 잠기면 다행이고, 물에 잠기면 어쩔 수 없다는 식이다.

해전리에 원예가 보급되면서 하천부지 일대가 비닐하우스로 뒤덮였다. 모두 해전 마을 주민들의 경작지이다. 원예농업이 도입되면서 이곳에서는 봄배추, 가을무가 재배되기 시작하였다.

 

“백사장은 강 끄트머리고, 거기서 제방 쪽으로는 토사가 쌓여 높아진 디가 경작지입니다. 나도 처음에는 만경강 부지에 무, 배추를 많이 했습니다. 대나무 활대를 휘어가지고 턴널로 농사질 때부터. 내가 만경강에 18마지기가 있었어요. 거기에서 봄 무, 가을 배추 농사져서 내 동생 셋을 대학까지 다 갈쳤어요. 빚 안지고 살았어요. 봄에 무 농사짓고, 여름철에 쉬고 가을배추 합니다. 배추 할 때 늦태풍이 오면 가끔 잠길 때가 있어요. 그래도 사석땅이라 물이 잘 빠지니까 괜찮았어요. 우리동네 사람들 6~70%는 하천부지에서 농사졌어요. 우리 동네 입장에서는 감사한 땅이었어요.”

 

하천부지에서 대규모로 비닐하우스 원예농업을 시행한 곳은 해전마을 뿐이었다.

 

“원예가 보급되면서 하천부지에서 하우스를 많이 했어요. 나도 수박하고, 가을배추를 많이 했어요. 만경강에 집단적으로 하우스 한 곳은 우리 동네밖에 없었어요. 하우스 수백 동이 되었으니까요. 수박은 장마 전에 다 출하해요. 하우스에서 석 달 커요. 만경강 안에는 모래가 많아서 물이 잘 빠지니까 숙성이 빨라요. 질땅 수박보다 만경강 수박이 훨씬 달아요. 배수가 잘되니까 당도가 높아요. 그 대신 모래땅이라 영양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해요.”(이석룡)

 

비록 하천부지라고 해도 비닐하우스는 상시적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즉 장마철에도 철거하지 않고 비닐만 둘둘 말아서 상단부에 거치해 놓은 채 버텼다. 가을배추 심은 뒤 서리 내릴 무렵이면 보온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천부지는 매년 사용료를 내야 한다. 납부영수증 상의 공식 명칭은 ‘하천점용료’이다. 주민들은 세금으로 알고 있다. 하천사용료는 4년에 한 번씩 갱신을 한다. 4년째가 되면 다시 계약하라고 읍사무소에서 연락이 온다고 한다. 이때 갱신을 안 하면 계약이 해제되어 ‘하천점용료’ 고지서가 안 나온다. 당장 불법경작이 되지만 사용료를 안 내도고도 경작은 계속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다 크게 불이익을 당한 일이 ‘경작금지조치’ 이후에 벌어졌다.

 

 

 

“옛날에 제방 안쪽 하천부지에 뽕나무를 엄청 키운 사람이 있었어요. 제방 바깥쪽 하천부지에는 잠사(蠶舍)를 크게 짓고요. 양잠업이 끝난 뒤에는 개축해서 젖소를 키웠어요. 그 분이 하천사용료 갱신을 안 하니까 계약이 취소되었어요. 세금 안 내고도 계속 사용할 수 있을 때는 좋았는데, 경작금지조치 이후에 보상을 전혀 못받았어요. 납부근거가 있는 농가만 보상을 해줬거든요. 보상 못 받은 분이 그분 말고도 많았어요.”

 

하천부지라서 당연히 개인이 등기를 내지 못하는 국가땅이다. 애초에는 토지가 없는 극빈자들을 구휼하는 차원에서 경작을 허용 혹은 묵인해왔다. 그러다가 국가가 하천부지를 관리하기 시작하였고, 이들에게 하천점용료를 부과하였다. 고지서 명칭대로 ‘점유권’을 인정한 것이다. 하천부지의 농경지 점유권을 인정받은 사람들은 등기만 나지 않았지 본인 소유농지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사인간 매매도 문제없이 이루어졌다. 가격만 육답(제방 바깥 정상적인 농지)에 비해 절반 정도로 낮을 뿐이었다. 일부 농가에게는 먹고사는 데에 절대적인 경작지였다.

2014년, 국토부는 4대강 정비사업 후 강변 하천부지에서의 농지경작 행위를 전면금지했다. 하천의 수질관리를 위한 정책판단이었다. 점유권 인정은 점용료 납부여부로 판단하였다. 농지에 대한 보상도 이를 근거로 집행하였다. 주민들 말로는 농지보상비는 ‘쬐끔’ 줬다고 한다. 그 대신 비닐하우스, 지하수 펌프 등 지장물에 대해서 별도의 보상을 받았다고 한다.

 

 

9. 해전리 상수도 변천사

 

앞에서 언급했듯이 해전 마을은 지하수에 문제가 있다. 철분이 많아서 변색이 된다. 그래서 식수로도 사용하지 못했다. 상수도가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 샘도 없이 해전마을 주민들은 어떻게 식수문제를 해결했을까. 다른 방도가 없다. 가장 오래 전에는 대간선수로 후정리에서 분기해 마을 뒤로 들어오는 ‘똘물’을 그냥 마셨다. 농업용수가 식수였다. 아무 탈이 없었다. 오히려 어른들은 ‘운암산 물’이라며, 좋은 물이라고 하였다. 동상면 대아리저수지가 있는 산이 운암산이기 때문이다.

고산천 물이 고산 어우리 취수구에서부터 분리되어 봉동과 삼례 내륙으로 달려온다. 만경강 삼례 취수구에서 다시 용수를 공급받아 비비정 터널수로를 지나 후정리에서 대간선수로에 재공급한다. 이 수로의 한 가닥이 분기하여 해전리로 들어와 ‘뒷냇갈’이 된다. 이 물을 떠다가 부엌에 묻은 큰 물항아리에 채워놓고 식수로 사용한 것이다.

해전리가 ‘똘물’을 먹을 당시에는 대간선수로가 오는 동안 수질오염원이 거의 없었다. 주변에 공장지대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농약도 없던 시절이다. 설령 논밭에서 농약을 사용한다 해도 배수로가 따로 있어서 대간선수로로 유입되지 않았다. 각 가정의 분뇨는 거름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오히려 단도리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주변 마을의 생활하수만 흘러들 정도였다. 가장 위태로운 구간이라고 하면 삼례 마치와 금반지를 지나는, 능선을 절개한 협곡이다. 찰방다리를 지나면서 비탈진 주변에 판잣집 등 위생이 신통치 않은 빈민촌이 몰려있던 시절이었다.

‘똘물’을 먹던 해전리 주민들이 식수용 물을 긷는 시간은 새벽이다. 빨래 등 가급적이면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시간이고, 또 이물질 등이 밤새 가라앉아 있을 시간이기 때문이다.

1960년대 초부터는 식수확보 방식이 달라진다. 당시는 대간선수로도 오염되기 시작한다. 농약사용이 늘어나고 생활양식도 변모하면서 수질오염 요인이 증가하였다. 특히 겨울철에는 대아리저수지에서 방류를 차단하기 때문에 수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진다. 이러던 차에 마침 지하수개발 기술도 보급되고 있었다. 집집마다 지하수를 뚫어서 작두시암을 놓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집집마다 가정식 정수장치를 설치하였다.

 

“내가 1959년에 군대를 갔는데, 그때도 또랑물을 먹은 것 같아요. 62년에 제대할 무렵부터 작두시암을 시작한 것 같네요. 똘물이 오염되니까 지하수를 걸러먹는 방식이 개발되었어요. 집집마다 파이프를 박아서 작두시암을 만들고, 둥그런 노깡을 이용하거나 네모지게 콘크리트 벽돌로 쌓아서 집수통을 만들어요. 부엌쪽 처마 밑에. 작두로 품어올리면 물이 집수통으로 떨어지게 해요. 집수통에는 맨 밑에 숯을 깔아요. 그 위에 자갈 한 층, 모래 한 층씩 쌓아요. 모래와 자갈을 시루떡처럼 몇 층으로 쌓아요. 그리고 집수통 밑으로 땅을 파고 항아리를 묻어요. 집수통 아래쪽에 구멍을 내면 걸러진 물이 항아리로 쫄쫄쫄 떨어지게 하는 거요. 지하수가 소금기는 없는데 ‘녹’이 올라온게 그래요.”

 

이른바 가정식 간이정수장이다. “물이 올라올 때 보면 깨끗한 것 같은데 ‘다라이’에 담아놓으면 녹슨 것처럼 벌겋게 변하는” 지하수였기 때문에 주민들이 부득이하게 개발한 방식이다. 집수통의 모래자갈도 시일이 지나면 벌겋게 이물질이 낀다. 주기적으로 모래를 걷어내서 말린 뒤에 재사용하였다. 식수 문제로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거의 사투였다.

그러다가 드디어 상수도가 들어왔다. 다른 지역은 꿈도 못 꾸던 시절에, 역설적이게도 해전리에는 근대식 상수도가 공급된 것이다. 지리적 이점 때문이었고, 비비정 정수장 덕분이었다. 일제시기에 이리(익산)에 살던 일본인들을 비롯한 주민들의 식수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다. 익산은 평지에 위치하고 주변에 이렇다할 수원(水源)이 없어서 예나 지금이나 식수문제가 심각한 현안인 지역이다. 이들이 찾아낸 방안은 수자원이 넘치는 삼례땅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1931년에 삼례읍 삼례리 들판 6필지에 2개의 원형 지하수 집수정(集水井)을 만들었다. 이곳은 만경강에 근접하고 ‘사석거리’이기 때문에 지하수가 풍부하였다. 집수정에 모인 물이 자연스럽게 비비정 양수장(펌프장)으로 유입되게 설계하였다. 집수정 지하수가 양수장으로 들어오면 모타를 이용하여 비비정 정상으로 펌핑하여 취수탑에 저장하고, 삼례-익산간 27번 도로를 따라 매설한 토관을 타고 익산으로 공급하는 방식이다. 비비정에 정수장이 설치되면서 무명이었던 이 산은 ‘수도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비비정 정수장에서 익산까지 수도관이 지나는 길목에 해전이 위치한다. 이 마을 식수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인지 이 수도관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관을 빼서 마을수도로 연결해 준 것이다. 비록 마을 공동수도였지만 드디어 해전마을 상수도 문제가 해소되었다.

그런데 영원할 것 같았던 상수도가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상수도 취수원인 만경강에서 오염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오염의 가장 큰 원인은 전주천이었고, 전주천 오염원은 생활오폐수와 팔복동 공단의 산업폐수였다, 물이 시커멓게 썩어갈 뿐만 아니라 악취가 진동하였다. 익산시에서는 식수용 만경강 집수를 중단하게 되고, 1931년에 설치한 비비정 정수장도 역할을 다하고 1971년에 폐쇄된다. 만경강 오염과 익산시의 취수중단이라는 불똥이 해전마을까지 튄 것이다. 비비정 정수장 폐쇄 이후 해전마을 상수도 대안은 ‘간이상수도’가 이어받았다.

 

“간이상수도가 생겼어요. 원래 삼례역 후정리는 땅이 황토흙이에요. 여기하고 달라요. 그런게 거기서 지하수를 파서 물탱크에 모아서 각 마을로 내려보냈어요. 그래서 한 집 건너 간이수도를 놓았어요. 지하수가 안 좋은 동네만 공급했어요. 마을별로 자금을 만들면 군에서 보조금 보태서 간이상수도를 연결해 주는 사업이었어요.”

 

간이상수도는 시장, 군수가 관리책임자가 되는 소규모 수도시설이다. 대규모 상수도는 정수장에서 고도정수를 통해 공급되지만 간이상수도는 지하수를 취수하여 간단한 수질검사만 시행한다. 수질이 양호하다고 판단되면 정수시설 없이 공급한다. 일반적으로는 밤에 물탱크에 취수한 후 낮에 공급하는 방식이다. 삼례 읍내는 구릉지대이기 때문에 토질이 황토이고 지하수도 음용수로 양호해서 간이상수도로 활용하였다. 이 시설은 삼례 후정리 구역전 뒤, 대간선수로 제수문이 있는 근처에 있었다.

해전마을은 이렇듯 간이상수도 시기를 거친 뒤에야 현재의 상수도가 보급되었다. 해전에 상수도가 들어오자 기존의 간이상수도는, 역시 마찬가지로 지하수에 문제가 있는 사천(익산시 춘포면)으로 인계하였다.

 

“삼례 후정리 수문있는데, 거기 가면 간이상수도 자리가 지금도 있을 거요. 그러다가 수도가 들어오니까 그 물을 사천으로 인계해줬어요. 사천은 대장촌에서 물이 못 오니까 수도가 올 디가 없거든요. 사천에 가면 간이상수도 물탑이 지금도 남아있어요. 나중에 봉개산에서 지하수를 끌어다가 먹었어요. 그 동네에서 돈을 만들어서 상수도 탑을 만들었을 거요. 사천은 수도 들어올 디가 없어요. 완주군에서 가야 돼요. 지금도 사용하는지는 모르겠어요.”

 

해전마을 식수와 상수도 변천사는 이렇게 지난한 과정을 거쳐 왔다. 근본 배경은 지리적 입지 때문에 지하수가 식수로 부적합한 탓이었다.

 

“원 상수도가 들어오기는 얼마 안 돼요. 간이상수도를 오래 먹었어요. 해전에 언제 수도가 들어왔는지는 완주군수도사업소에 물어보면 바로 알아요. 봉동에 있어요. 10년 이상은 간이상수도 물을 먹었어요.”

 

 

10. 에필로그

 

1) 함경북도 청진에서 해전으로

 

해전마을 근현대사와 주민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에 결정적인 제보자는 이석룡 씨이다. 그가 영유아기였던 시절에 이색적인 경험이 있어서 끝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그의 부친은 철도공무원이었다. 이석룡은 해전마을에서 출생했지만 한 살 무렵에 이북으로 가서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살다가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부친의 근무지가 함경북도 청진으로 발령이 났으며, 연도로 따지면 1938년 무렵이다. 함경북도는 한반도 최북단으로 동해안에 접하고 있으며, 청진시는 북쪽으로 회령시만 지나면 두만강이다. 일제강점기 때 청진 수성초등학교를 다니다가 부친이 이리(익산)로 발령이 나서 다시 해전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다음은 그 당시 그가 체험한 경험담이다.

 

“청진에서 초등학교 1~2학년 다닐 때 삼례로 내려왔어요. 청진은 논이 아예 없어서 벼농사가 뭔지도 몰랐어요. 거기는 전부 밭이에요. 감자, 옥수수, 수수, 기장 그런 것만 농사지어요. 그때는 아버지가 공무원이었으니까 일주일이나 이주일에 한 번씩 배급소에서 식량을 받아와요. 청진은 강만 건너면 만주 땅이에요. 만주 가서 물물교환한 것도 기억나고 명태, 대구가 흔했어요.”

 

그의 조부모님은 모두 해전에 살고 계셨다. 그도 다시 삼례초등학교로 학년에 맞게 입학해야 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학교를 즉시 안 보냈다고 한다.

 

“여기 오니까 학생들이 다 모심으러 다니는 거요. 5, 6학년은 비행장 밖으로까지 가서 모심고 와요. 그런게 우리 아버지가 ‘애들 일 시킨다’고 학교를 안 보내는 겁니다. 또 그때가 해방 직전이라 정세도 시끌시끌 했거든요. 해방 후에사 학교를 보내서 아마 열 한두 살에 갔을 거요. 이북에서는 여섯 살 때 학교를 갔어요.”

 

2) 일제강점기 이와사키 동산(東山) 농장

 

동산촌은 과거에 완주군 조촌면이었다. 현재는 전주시 여의동으로 행정구역도 바뀌고 명칭도 변경되었다. ‘동산촌’이라는 지명이 일제 잔재였기 때문이다.

미쓰비시 그룹의 창업주가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彌太郞)이며 그의 호가 바로 동산(東山)이다. 미쓰비시 창업주의 장남이자 3대 총수였던 이와사키 하시야(岩崎久彌)는 식민지 지배하에 있던 조선에 동산농사주식회사(東山農事株式會社)를 세우고 전주, 익산, 김제, 군산을 비롯하여 경기도, 전라남도, 강원도에 이르는 방대한 토지(2,100만 평 추정)를 약탈적 방법으로 차지하고 악랄한 고율의 소작료로 식민지 조선의 농업을 파탄에 이르게 하였다.

해전뜰 상당 부분이 ‘이와사키’가 농장주인 동산농장 소유지였나 보다. 이와 관련하여 이석룡은 어른들한테 들었다며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동산촌 현 전북제일고 자리가 왜정 때 일본인 지주의 농장이 있던 자리입니다. 우리동네 사람들이 가을이면 나락가마니 짊어지고 단체로 소작료 내러 댕겼다고 해요. 해전에서 동산촌 동산농장으로.”

 

일제강점기에 해전마을 주민들은 상당수가 동산농장 소작농이었다. 동산촌은 그전까지 쪽구름, 조각 구름 뜻의 편운리(片雲里)로 불리던 조용한 농촌 마을이었다. 이곳이 미쓰비시 창업주의 호를 딴 동산촌(東山村)으로 개명된 것이다. 일제 잔재(殘在)라는 이유로 이 지명은 근래에 폐기되었다.

 

 

김성식 박사(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 특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