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전벽해 환골탈태, 비비정 마을의 생존記 (1)

1. 비비정 야산이 ‘수도산’인 내력

 

 

 

 

 

 

 

 

 

 

 

 

 

 

 

 

 

고산천, 소양천, 전주천이 합류하여 비로소 강다운 강을 이루는 곳, 삼례 비비정 마을이다. 만경강 본류가 시작되는 지점에 비비정 마을이 있고, 풍광이 빼어난 정자(亭子) 비비정(飛飛亭)이 있다. 비비정 마을과 정자 비비정은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전형답다. 산다운 산이 전무한 삼례땅에 배산임수라니?

삼례에는 ‘수도산’이 있다. 사실 이렇다 할 이름조차 없던 구릉성 산지, 기껏해야 해발 30미터쯤 될까? 이 산을 삼례 사람들은 ‘수도산’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일제강점기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묘하다. 이 산에서는 두 가지 공사가 벌어졌는데 공교롭게도 두 사업명 모두 ‘수도’가 들어간 사업이다. 그 중 한가지는 수도(水道)사업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상수도사업이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 혹은 1922년, 당시 이리(裡里)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상수도가 필요했다. 익산지역은 예나 지금이나 별다른 수원이 없어서 식수문제가 늘 현안이 되는 도시이다. 근래까지도 익산지역 주민들은 고산 어우리 취수구에서부터 시작되는 대간선도수로, 즉 농업용수를 정화해 식수로 사용해왔다. 일본인들은 특별한 상수도를 개발했다. 삼례지역은 충적지로서 사질토가 대부분이다. 물이 잘 빠지고, 지하수가 풍부한 지역이다. 만경강 삼례 취수구에서 200여 미터 거리를 둔 평지에 4개의 큰 샘을 둥그렇게 팠다. 주변 지하수가 이곳으로 빠르게 모여든다. 비비정 마을 동편에 양수장을 설치했다. 수도산 정상에는 정수장을 만들었다. 파이프를 두 개의 샘이 있는 곳까지 묻고 발동기로 이 물을 인수하여, 수도산 정상으로 뿜어 올린다. 거리는 3~400미터 남짓이다. 정수장에서 정수과정을 거친 식수는 다시 파이프 관을 통해 익산으로 공급되었다. 비비정이 ‘수도산’이라는 명칭을 얻은 배경이다.

 

 

 

또 하나의 공사는 이보다 10년쯤 앞선 1910년대 초반. 익옥수리조합에서 수행한 삼례 취수구와 수로공사이다. 정확한 시기와 명칭은 1910년 2월부터 시작해 1912년 5월에 준공한 “완주군 삼례읍 후정리 비비정~익산군 북일면 영등리간 12.16㎞ 수로공사”였다. 이때 비비정에는 취수구와 도수로를 신설하기 위해서 비비정을 관통하는 터널을 뚫었다. 현재도 그대로 남아있는 이 수로공사의 하나가 ‘비비정 수도隧道)공사’이다. 이때의 ‘수도’는 터널공사를 말한다. 이후 비비정 터널 수로는 1920년에 임익남부와 임옥수리조합이 익옥수리조합으로 합병한 뒤1920년 5월, 기존의 밑바닥 폭 7자를 14자(425cm)로 확장하는 공사를 재차 시행한다. 비비정의 ‘수도산’이라는 명칭은 두 사업 중 하나에서 비롯되었다. 아무래도 산 정상에 정수장이 설치되었다는 점에서 지명의 유래로는 전자가 더 가까울 것 같다.

 

 

2. 비비정 마을형성 유래

 

 

앞에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전형”이니 “풍광이 빼어난 비비정(飛飛亭)”이라고 묘사를 했지만, 비비정 마을 주민들의 고단한 삶과는 무관하고 사치스러운 비유일 뿐이다. 비비정 마을사(史)를 들추기 위해서 시간을 조금만 되돌려도 ‘지지리도 궁상맞은’ 이들의 초상과 마주하게 된다.

 

‘삼례 빈촌 중의 빈촌’

‘녹두밭 웃머리’

‘만경강유역 자투리땅’

 

자타(自他)가 비비정 마을의 빈한함을 드러내는 수식어들이다. 이 마을은 어떤 사연이 있길래 이러한 세평에 놓여 있었을까. 모두가 가난하던 절대빈곤의 시절을 대부분 겪고 살아왔음에도, 유독 비비정 마을은 비할 바 아니기에 이와 같은 수식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비비정 마을은 탄생부터가 사건이자 비극이었다. 비비정 마을사(史)의 단서가 되는 신문기사부터 숙독해야 한다. 앞서 제목은 “전주 삼례면, 지난번 대홍수 침해로 이전문제 대두”이고, 때는 1930년 8월 23일자 기사이다.

 

“전주군 삼례면 안좌리(安座里)와 동 대천리(大川里), 신안리(新安里), 하백리(下白里) 등 네 부락은 지난번 홍수피해가 우심(尤甚)한 곳인데, 원래 그 지대는 다른 곳에 비하여 깊은 곳인데다가 만경강 제방을 개축한 까닭에 사면에서 흐르는 큰 냇물이 속히 빠지지 못하여 그와 같이 침수가 된 것인 바,

대정15년(1926) 만경강 개수공사를 착수할 당시에도 그 부락의 장래가 위험할 것을 예상하고 전북도 지방비의 보조로 부락민 전부를 안전지대로 이전시키려고까지 하였든 바 수백 년을 그곳에서 살아온 지원민(원주민)은 일시에 그곳을 황폐지를 만들고 다른 곳에 이전하기가 싫다하여 이에 불응하였든 바,

이번에 그와 같은 참담한 수해를 겪은 후는 즉시 이전코저 도에 진정도 하고 여러 가지로 이전 운동에 힘써왔었는데 이에 대하여 전기 네 부락 부근에 토지를 가진 지주들이 “그 부락은 거의 소작인들이 사는 부락인데 만일 동 부락을 이전하면 전답을 경작하는 데에 시비(施肥)와 제초(除草) 등에 자연 불편과 나태로 말미암아 수확이 줄어든다는 이유로 이전을 반대”하여,

어떤 지주는 “지주가 있은 후에 소작인이 있다.” 또는 “일반 도민이 부담하는 지방비로 어찌 몇 개의 부락을 위하여 소비할 수 있으랴.”는 등 별별 이유를 다 붙여가며 극력 반대할 뿐만 아니라 도지사 또는 토목과장을 방문하여 “지주는 자위(自衛)상 부락민 이전을 극력 반대한다.”는 의사를 표명하는 등 대 활동 중이라 한다.“

 

기사의 줄거리를 추려보자.

첫째, 이 기사 시점으로 보아 적어도 1930년 8월경에는 만경강 제방이 축조되고 있다는 정보이다.

둘째, 제방이 축조되는 바람에 그나마도 저지대인 마을과 농경지에서 위기가 발생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마을이 오른쪽 지도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안좌리, 대천리, 하백리, 신안리이다.1) 그리고 이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소작농으로 구성되어 있음도 알 수 있다.

셋째, 1926년 만경강개수공사를 착수할 당시부터 위 네 개의 마을에 대한 위험이 검토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공사 측인 총독부 이리토목출장소에서도 이 마을을 안전지대로 이전시킨다는 계획을 수립했으나, 당시에는 주민들이 응하지 않아서 시행되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넷째, 1930년에 수해가 났는데 만경강에 신축한 제방이 배수에 장애물이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예년에 겪어보지 못한 규모의 침수피해를 입은 것이다.

다섯째, 참담한 수해를 입은 뒤로 주민들은 마을 이전을 관계당국에 요구하고 나섰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지주들의 반대가 거세다는 점이다. 위 기사에 담긴 지주들의 반대 사유로 볼 때, 소작농에 대한 그들의 인식이 얼마나 처참했는지가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문제의 네 개 마을은 본래 창덕면 안좌리, 대천리, 하백리, 신복리였는데, 1914년 군면폐합과 행정구역 개편에 의하여 삼례면 삼례리로 편재되었다. 이 마을이 정확히 어느 해에 이전했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구조적인 문제로 이곳에서는 똑같은 수해가 반복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오래지 않아서 마을을 폐쇄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비비정 마을에 거주하는 고령자들 진술을 들어보면 할아버지 때, 혹은 아버지가 어렸을 적에 비비정으로 들어왔고, 본인들은 비비정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예컨대 현재 85세(1938년생)인 주민 이영이 씨는 비비정에서 태어났다. 친정 아버지나 시부모는 다 안좌리에서 이주한 분들이다.

 

“시아버지 시어머니는 다 안좌리에 여기로 오셨대요. 남편은 비비정에서 태어났다고 하고. 우리 친정아버지도 안좌리에서 사시다가 이리 오셨대요. 나는 여기서 태어났고, 한 동네로 시집가서, 지금도 살고 있어요.”

-이영이(여, 85세, 1938년생, 삼례읍 후정리 비비정마을)

 

이영이 씨 기준으로는 이주한 2세대가 된다. 2세대가 이미 80대 후반의 고령자인 것으로 보아도 안좌리 등 위 네 개 마을 주민들이 이주한 시기는 최소 90년 이상이다. 그렇다면 1930년대 어느 시점에서 이들 마을을 폐쇄하고 집단이주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보상이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모든 공공개발사업은 일제 때의 보상체계를 그대로 답습하였다. 일제시기 문서자료를 보면 개발시 보상비는 예산으로 책정되어 있다. 다만 어떻게 집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앞의 기사에 의하면 이들 마을에 살던 원주민들은 거의가 소작농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자가 농경지가 없거나, 있어도 소규모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보상항목이라는 것이 위로금 형식의 이주비에 지나지 않는다. 앞이 캄캄할 노릇이다.

이들 가운데 일부가 몰려온 곳이 바로 비비정 남쪽 어귀였다. 소나무 등 잡목이 우거진 강기슭에 돌은 들어내고 나무는 잘라내고 잡목은 걷어내 터를 간신히 마련했다. 움막집과 다름없는 판잣집을 되는대로 짓고 살기 시작했다. 후술하겠지만 이들은 제방 호안공사에 소요되는 석재를 채취한 자리에도 움막을 지었다. 만경강 제방축조로 배수가 되지 않아 살던 곳이 상습침수지구가 되는 바람에 고향마을을 등졌는데, 이주한 곳도 한물지면 위태롭긴 마찬가지 조건이다. 이들이 터잡은 비비정은 지목상 하천부지였다. 무주공산 지대였기 때문에 이들이 몰려들 수 있었다. 해방 후 어느 시점부터 이들은 1년에 한 차례씩 정부에 하천사용료를 내고 살다가, 집터는 정부의 불하로 매입할 수 있었다.

 

“우리 집도 솔나무가 쩔었던 디를 다 파서 집 짓고 그랬다고 해요. 우리집은 나중에 새로 지었어요. 여기 땅은 다 하천부지인데 나중에 정부에서 불하를 해줘서 샀어요. 지금은 땅금 비싸고 난리도 아녀요. 옛날에는 측량이 뭔지고 모르고 그냥 살았어요. 애기들 키우고 먹고사느라 아무 정신도 없이 살았응게. 그런디 눈 밝은 사람들은 다 측량을 했던개벼요. 어느 날 ‘여기는 우리 땅이니까 내놓으라’고 그려. 마당 끝에 밭이랑 다 뺏겼어요. 여기는 다 하천부지고 그린벨트였어요.”

 

그런데 여기에 마을이 형성되기 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실제로 현재 ‘비비정 공원파크’로 재구조화한 수도산 서쪽 사면은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비비정 마을이 형성된 곳은 수도산 동남쪽이다. 마을에서 산 쪽에 등을 댄 개개의 가옥 뒤안을 보면 코앞이 암석지대이다.

 

“여기가 본래 남포 틀어서 독을 떨어내던 남포간이라고 들었어요. 제방 쌓던 경칫돌.”

 

권영애 씨 집 뒤안이 그런 곳이다. 바위지대에 집을 지은 것이다. 일제강점기 초기 때 찍은 옛사진을 보더라도 수도산에서 강 쪽으로 암석지대가 이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위의 권영애 씨 진술을 신뢰한다면 만경강 호안공사 때 필요한 석재를 이곳에서 채취한 것이 된다. 시간상으로도 제방공사 이후에 안좌리 일대가 침수되는 악순환이 발생하였고, 몇 해 후에 이주하였다면 마을 위쪽으로는 경칫돌을 채취한 뒤 평평해지거나 낮아진 곳에 터를 잡은 것이 된다. 또 마을 뒤로는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있었던 것 같다. 권영애 씨의 다음과 같은 진술이 뚜렷하다.

 

“이 동네가 어떻게 생겼냐면, 완자리(안좌리)라고, 전주가는 신작로 길 건너 쪽에 동네가 있었는디, 한물이 져서 집이 다 떠널러 갔어. 그때 여기는 공동산이었어. 공동묘지. 그때 수해로 집도 절도 없던 사람들이 여기로 모여들어서 집 짓고 살았어. 큰물져서 떠널러가니까 갈 디가 없어. 야산이라도 산이 여기밖에 없어. 거기서 살다가 여기서 움막 짓고 살기 시작했어. 공동묘지에. 그때 왔던 분들은 다 돌아가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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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안리(新安里)는 신복리(新卜里)의 오기로 보인다. 그렇게 볼 때, 위 기사에 실린 네 개의 마을과 위치를 지도에서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신복리는 현재 하리에 속한 마을로 존재하고 있다.

 

 

김성식 박사(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 특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