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전벽해 환골탈태, 비비정 마을의 생존記 (2)

3. 비비정 주민들의 애환, 역경의 세월

 

1) 강변 하천부지 경작과 정부의 회수조치

 

이들의 삶은 가파른 벼랑 끝이었다. 남자들은 자포자기한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단명한 남자들이 많았다. 지금 비비정 마을에 고령의 여성들이 주류를 이룬 원인과도 무관하지 않다. 농지가 없는 주민들의 생계수단은 만경강뿐이었다. 이들은 제방 안쪽의 하천부지를 개간하여 밭을 일구었다. 밭에는 호밀, 밀, 서숙(조) 등 곡물이 되는 작물을 경작하였다.

만경강은 중하류로 갈수록 바닷물 왕래로 갯펄이 퇴적되면서 간석지가 넓게 형성된다. 이런 곳에는 주로 나문재, 갯갈대, 함초 등 염생식물이 산다. 일제강점기 때는 강 하구 쪽을 대규모로 간척하였다. 해방 후에는 만경강 중류 지역에서 간석지를 개간하여 논으로 만든 곳이 많았다. 주로 개인적으로 일명 ‘땅뙤기’라고 하는, 삽 한 자루로 제방을 쌓아 논을 만들었다. 일부 업자들은 장비를 투입하여 꽤 큰 규모도 조성하여 불하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조성한 소규모 간척지는 사인 간에 매매도 이루어졌다. 하천부지임에도 이런 방식으로 경작지를 늘려나간 사례가 많았다. 만경강에서는 주로 김제시 백구면, 청하면, 만경면, 옥구군 대야면 등이 그랬다. 만경강 중하류지역까지 조수의 왕래가 활발해서 간석지가 발달했고, 제방 안에 또 제방을 쌓아서 경작지를 조성했다는 특징이 있다.

 

 

반면에 봉동면 삼례면 춘포면 등 중류와 상류 어간에 있는 지역에서는 하천부지를 논보다 밭으로 이용했다. 제방 안쪽에 별도의 제방을 만들어 조성할 만큼의 간석지가 없다. 갯벌처럼 점토성분의 토양축적이 거의 없는 지역이라 밭으로 이용할 수밖에 없다. 같은 하천부지라도 조류의 영향에 따라 하천부지 이용방식이 사뭇 달랐던 것이다.

비비정 마을 주민들이 하천부지에 경작지를 개간하여 밭농사 위주로 농사를 지은 이유이다. 그러나 논이나 밭이나 간에 만경강 전 구역에서 경작금지 조치가 시행되었다. 새만금간척사업 때문이었다. 새만금간척지 내수면에 조성되는 새만금호수의 수질관리 차원에서 행한 조치였다. 그때가 2015년을 전후한 시기였다.

이때도 희비가 엇갈렸다. 어차피 하천부지였고 국가 땅이었기 때문에 환수조치에 따라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본인이 피땀으로 개간한 농지거나, 사인 간에 매매를 통해 장만했건 간에 정부의 느닷없는 조치임에도 항변할 수는 없었다. 당시는 개인의 개간으로 조성된 하천부지라도 매매가 이루어졌다. 제방 밖의 온전한 농지를 주민들은 ‘육답’이라고 부른다. 하천부지 경작지는 육답에 비해 매매가가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 장마나 호우, 사리 때 등 위험요인이 많고, 개인 등기가 불가한 농지이기 때문이다.

이때 비록 개인소유가 불가한 토지지만 보상은 이루어졌다. 보상 규모는 적을지라도 경작권을 인정해 준 셈이다. 다만 보상 대상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천사용료를 납부한 영수증이 필요했다. 매년 하천사용료를 납부한 농가는 보상 대상자가 되어 경작지 규모에 따라 차등지급 되었다. 반면에 납부하지 않은 경작자는 보상에서 제외되었다. 스스로 개간하고 오랫동안 내 경작지로 농사지어 왔지만 개인의 주장이나 이웃의 고증만으로는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이렇듯 납부 근거가 없어서 보상받지 못한 주민도 더러 존재했다. 현재 만경강변에 조성된 체육시설이나 녹지공간, 갈대밭, 수변공원, 자전거도로 등이 다 농경지였던 것이다.

 

2) 만경강과 수리조합 ‘또랑’ 어부살이

 

비비정 마을 주민들은 ‘어부 아닌 어부’였다. 만경강에서 나오는 수산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고기잡이는 만경강뿐이 아니다. 만경강도 발밑이지만 더 가까운 발밑이 ‘수리조합 또랑’이다. 대간선 수로가 표고를 달리하며 마을 앞으로 나란히 흐른다. 삼례 취수구에서 용수를 더 공급받은 대간선 수로가 비비정 터널(隧道)을 통과하기 위해서 동네 발밑으로 지난다. 만경강에서도, 수리조합 또랑에서도 물고기, 우렁, 참게 등을 똑같이 잡았다. 만경강에서는 ‘시라시’라고 부르는 실뱀장어까지 잡았다.

 

 

실뱀장어는 1960년대 말부터 잡았다. 주로 3월 초순에서 6월 초순까지 3개월 정도가 채취 기간이다. 본래 서해바다와 강이 만나는 기수지역에서 성장하는 게 뱀장어인데 부화할 때는 태평양으로 나간다. 남중국해 아래라고 한다. 따뜻한 이곳에서 알을 낳은 뒤 어미는 수명을 다하고, 갓 부화한 새끼들이 난류를 타고 남해안을 거쳐 3~6월에 서해안으로, 어미가 성장한 곳까지 본능적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체구나 길이가 바늘이나 이쑤시개 정도여서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그래서 밤에 랜턴을 들고 강가로 나가며, 모기장으로 만든 뜰채로 떠낸다.

그런데 만경강에서는 김제 청하 부근까지 어선과 틀망을 이용해 잡았다. 하루 두 번의 민물 때 양쪽에 그물을 늘어뜨린 어선 수십 척이 실뱀장어를 잡았다. 이 지경을 운좋게 통과한 실뱀장어가 최종 도달하는 곳이 비비정이다. 비비정 사람들은 특별한 어구가 없었다. 여기까지 올라오는 실뱀장어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실뱀장어 채취도 2005년부터 중단된다. 새만금방조제로 만경강 하구가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비비정 주민들의 고기잡이는 붕어, 메기, 모자, 장어 등이다. 그들은 강에서도 잡고, 수리조합 또랑에서도 잡았다. 강에서는 두 사람이 수로 양 끝에서 그물을 끌고 올라가는 식으로 잡았다.

 

 

“망을 그물처럼 엮어가지고 크게, 질게(길게) 만들어서 두 사람이 끄시는디, 저짝에서 이짝까지 닿는 놈. 혼자 못하니까 양쪽에서 끄셔. 그물에 막대기같은 것을 엮었어. 그물 밑에다는 잘족잘족한 톱을 달어. 톱은 무거운게 그물 추여. 양쪽에서 끄셔서 몰아 잡지. 그물 속에는 벨것이 다 있어. 미기, 붕어, 모자. 저녁밥 할라고 학독에 보리쌀 갈고 있으면 고기가 저 아래서 흐옇게 올라와. 그러면 아저씨들이 그물 가지고 나가.”

권영애 씨도 본인이 투망을 던질 줄 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제보를 한다.

 

“물고기는 투망으로 잡았지. 나도 할 줄 알어. 배 타고 잡는 사람도 있어. 배로 잡는 사람은 ‘노나리’라는 그물을 놓아. 잉어, 가마치, 미기, 빠가, 모자, 날치, 붕어들이 꽉찼어. 장어는 그물에 안 걸리고, ‘빠드레’(밧데리) 알어? 짊어지고 전기로 잡는 거. 그걸로 경치(犬齒) 쌓은 돌 사이에 넣으면 ‘삑!’ 나와서 뻗어. 그놈 갔다가 물에 담궈 놓으면 다시 살어나. 장어는 돌 사이에 살어. 고기를 투망, 노나리, 전기로 잡았어. 만날(맨날) 잡어. 일 년 내내. 시한(겨울)에도 잡어. 시한에도 미기 붕어가 나와. 여기 사람들은 다 강타고 살았어.”

 

수리조합 또랑에서 잡는 특별한 것은 우렁, 조개, 참게다. 참게잡이는 수문(水門)에서 이루어진다. 비오는 날이 제격이다.

 

“여기 수리조합 또랑이 빨래터요. 거리거리 빨래터가 있었어요. 고기를 강에서 잡는 사람은 강에서 잡고, 강은 바닥에 독이 많으니까 또랑에서 잡는 사람은 또랑에서 잡어요. 물문 앞에 새막같이 집을 지어놓고, 등불 써놓고 참게 잡아서 팔아먹고 살았어요.”

 

비가 오는 날은 또랑 수위도 상승하지만 물살도 빨라진다. 참게는 물살이 약해질 때까지 돌틈에 숨거나 수문 위로 올라가는 속성이 있다. 그래서 수문에 갈대로 만든 발을 쳐놓으면 참게들이 발을 타고 수없이 올라온다. 새막에 숨어있다가 수문 타고 올라오는 참게를 잡아 그릇에 담으면 그만이다. 이렇듯 비비정 주민들은 민물고기, 참게, 우렁이 등을 잡아서 팔거나 먹고 살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무서운 일이 발생하게 된다. 간디스토마, 폐디스토마에 감염되는 것이다.

 

 

“옛날에는 만경강이 대한민국에서 간디스토마가 가장 많다는 겁니다. 그런데 가난하고 못 배운 탓에 그런 사정을 알 리도 없이 고기를 잡아먹고 살다가 간디스토마로 돌아가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연세 많은 남자 어르신들이 우리 마을에는 거의 안 계십니다. 제 나이 남자들은 다 도시로 도시로 이농한 세대라서 저 외에는 이 마을에 아무도 안 살아요.”

 

만경강 고기잡이는 전주 ‘팔복동 공단’에서 쏟아지는 공장폐수가 전주천을 타고 유입되는 등 지류 곳곳에서 산업, 축산, 생활 오폐수가 아무런 여과장치 없이 쏟아지면서 더이상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강이 시커멓게 썩어가기 시작했다. 한내천을 가로지르는 ‘삼례보’는 남측 끝에 소위 ‘열칸수문’(10련 방수문)이 축조되어 있었다. 농번기에는 보의 수위를 상승시키기 위해서

 

수문을 잠그고, 호우시에 문을 열어 강물 흐름을 조절하였다. 전주팔복동 산업폐수가 유입되면서 삼례 ‘열칸수문’은 만경강 오염의 대표적 상징물이었다. 시각적으로도 이 수문 아래 형성되는 폐수거품은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다. 만경강은 1970년대부터 오염이 시작되었지만 심각하지 않았다. 비비정 사람들의 고기잡이는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2009년, ‘열칸수문’이 철거되면서 비비정 마을 주민들의 만경강 고기잡이도 중단되었다.

 

3) 대한민국 산업화와 만경강 골재채취

 

비비정 주민들은 대한민국이 산업화로 달려가던 시기에 강바닥에서 모래자갈을 채취하는 일로 생계를 삼았다. 마을 주민들은 먹고살기 위해서 모래자갈을 채취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대한민국 산업화에 일조한 셈이다. 이곳 골재가 가장 많이 쓰였던 곳이 ‘이리산업단지’였기 때문이다. 새마을사업 현장에서도 이곳 모래를 퍼갔고, 도농을 막론하고 주택신축 때도 이곳 모래자갈이 골조를 이루었다.

참고로 봉동 고산천의 골재채취에 대해서 잠깐 언급하고 가겠다. 1970년 이전까지 고산천은 강바닥 하상이 높아 어지간한 강우에도 홍수위험이 상존하였다. 지금보다 2미터 이상 강바닥이 높았다. 강바닥에 모래자갈이 쌓여 물길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수위를 높이는 원인이 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쌓은 제방 또한 부실하여 큰비만 오면 경찰서 비상 오포(사이렌)가 울리거나 제방에서 징을 쳐 위험을 알리는 일이 반복되었다. 제방 가까이 사는 주민들은 멍석이나 가마니를 들고나와 위험에 대비하였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준설 등 근원적인 해결에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다가 1970년 우연치 않게 이 문제가 해소되었다. 바닥 준설이 된 것이다. 1970년에 호남고속도로 전주-대전간 1차로 개통한다. 이 건설현장에 고산천 골재가 다 들어간 것이다. 당시 시공사는 현대건설이었다. 고속도로 시공사에서 볼 때 고산천은 골재가 넘쳐나는 데다가 거리도 가까웠다. 골재채취는 봉동 압대산부터 고천리 구간까지 이루어졌다. 최소 2미터 이상의 모래자갈을 채취했다고 한다. 현대건설의 골재채취는 고산천의 하상을 결정적으로 낮추는 1석2조의 역사(役事)가 되었으며, 봉동에서는 이후 아무리 긴 장마라도 사이렌을 울리거나 급박하게 징을 치는 일이 사라지게 되었다.

 

“우리 동네는 농토가 없으니까 소득이 없고, 가난할 수밖에 없어요. 강둑에서 물고기 잡고, 하천에서 모래자갈 채취하면서 살았어요. 특히 모래자갈을 트럭에 싣는 ‘상차’는 중노동을 넘어 상노동입니다. 모래삽은 ‘오삽’이라고 해서 크잖아요? 그걸로 퍼서 트럭에 던질 때면 갈빗대가 휘청거릴 정도에요. 저도 어릴 때 용돈이라도 벌라고 해봤거든요.”(김영두)

 

“우리도 모래자갈 치고 했어요. 왕자갈은 앞치마에 담아서 나르고. 쬐깐한 트럭 하나 채우면 3천원 줬어요. 그거 받아서 같이 일한 사람끼리 나눠요. 한 차에 모래도 3천원, 자갈도 3천원.”(이영이)

 

트럭이라고 말하는 골재차량은 1톤 용달트럭 정도일 것이다. 한 차 가득 채우면 3천 원을 간조해 준 것이다.

 

“모래는 사래로 추어야 해요. 자갈을 칠 때는 강바닥을 막삽 길이로 두자 반, 폭은 한자 반으로 그어서 파면 한 차가 나왔어요. 자갈 업자가 학고방 지어놓고 우리 동네 사람들 품을 사는 거요. 자갈차가 들어오면 자갈이 몇 차, 모래가 몇 차, 적는 서기가 있어요. 그런 업자들 몇 패가 다녀요. 차가 ‘굿’이었어요.”(이영이)

 

‘차가 굿이었다’는 말은 골재트럭 행렬이 북새통을 이루어 볼 만했다는 뜻이다. 건축현장에서 필요한 모래자갈을 조달하기 위해서 건축시공자와 골재업자가 계약을 하고, 업자는 이곳 비비정에 현장사무소를 지어놓고 건축현장에 공급할 골재를 채취한 것이다. 이런 업자가 여러 패 있었다고 하니 가히 북새통을 이루었을 것이다.

언제부터 이곳 골재가 반출되기 시작했을까. 이 마을 이영이 씨는 열아홉 살 때 시집갔다. 당시 시집갈 혼수를 장만할 때도 “상차 해주고 돈 벌어서” 했다고 한다. 그 돈으로 옷감을 떠서 적삼 5개, 박음저고리 5개, 치마를 만들었다고 하니, 1950년대에도 일부 골재채취업자들이 있었나 보다. 대개는 당시를 무법시대라고 말하지만 적어도 1960년대 중반부터는 지자체의 허가를 받아야 하천부지 골재채취와 반출이 가능했다. 물론 게 중에 불법 업자들이 없기야 했겠느냐마는 그건 하등의 문제가 아니었다. 상차해 주고 품삯만 받으면 그만이다.

비비정 주민들은 트럭이 들어오지 않아도 모래자갈을 채취해 놓는다. 강변에 미리 쌓아놨다가 자갈차가 들어오면 모아두었던 골재를 상차한다.

 

“왕자갈도 파가고, 막자갈도 파가고, 모래도 잔모래가 있고, 굵은모래가 있고 그래요. 그렁게 우리는 어디 파면 굵은 모래고, 어디 파면 잔모래인지 다 알아요. ‘사래’로 쳐. 구멍이 숭숭한 철망에다가 밥상처럼 네모지게 판자를 대서 만들어요. 삽으로 떠서 사래에 올려주면 강물에 내둘러서 막자갈을 추려내요. 철망으로 모래만 빠진게.

미리 취해서 쌓아놓기도 해요. 큰물지면 다 떠널러 가버려. 그러면 쇠 당그레로 다시 긁어 모서 팔아먹고. 이 동네 앞에서만 한 게 아녀요. 하리 위에서까지 자갈 치고 그랬어요. 우리 동네 사람들은 자갈 치고 상차한다고 남자고 여자고 다 골병들었어요.”(이영이)

 

이렇듯 만경강변에서 골재를 채취하던 시절은 1980년대 초까지 이어졌다. 만경강이 오염되어 “물이 시커멓게 썩은 뒤로는 모래자갈 채취도 안 하고, 물고기도 안 잡았다.”고 한다. 만경강 골재채취 업자들은 이후 현장을 옮겨 육상골재를 채취하기 시작했다. 육상골재란 논에서 채취하는 골재를 말한다. 육상골재 채취는 1990년대에 절정을 이루었다. 이 과정에서 골재업자들이 계약과 달리 원상복구를 제대로 하지 않는 등 사회적 문제도 크게 발생한다.

 

 

4. 비비정 마을의 환골탈태, ‘신문화공간조성사업’

 

1) 완주군과 ‘희망제작소’의 업무협약(MOU) 체결

 

2008년, 완주군(임정엽 군수)은 ‘재단법인 희망제작소’와 MOU를 체결한다. 완주군에서 커뮤니티 비즈니스사업(CB)을 지원하는 첫 파트너쉽을 맺은 것이다. 희망제작소는 2008년 7월에서 2009년 6월까지 완주군 전역에서 자연자원, 역사자원, 문화자원, 경제활동자원, 공동체자원을 조사·기록하였다. <신택리지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마을별 자원조사를 한 것이다. 이어 마을자원 가운데 사업화 가능 여부에 따라 마을에 적합한 커뮤니티 비즈니스 자원 445개와 모델사업계획 66개를 도출해냈다.

2010년, 완주군에서는 <재단법인 완주커뮤니티 비즈니스센터>를 설립하여 본격적인 사업지원을 추진하였다. <희망제작소>와 <완주커뮤니티 비즈니스센터>는 상호 신뢰를 기반으로 ‘지속가능한 지역 만들기 공동사업 추진’을 약속하고, 앞으로 양 기관의 전문성과 장점을 충분히 활용하여 다양한 사업을 제안 및 공동으로 추진하기로 한다.

 

커뮤니티 비즈니스란 무엇인가? 지역의 자원을 활용하여 지역 과제를 해결하고, 문화와 환경 등 지역주민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를 계승하면서, 공동체가 중심이 되어 주도하는 지역살리기 사업을 말한다. 사업의 지속성을 위해 비즈니스를 도입했기 때문에 일부 수익이 생기는데, 이때 인건비와 운영비를 제외한 나머지 수익을 지역사회에 환원하고, ‘적정규모⋅적정이익’을 유지하는 것을 기조로 한다. 다시 말하면 마을의 문화·역사자원에 기반하여 마을기업을 설립하는 것이다. 마을기업 육성사업의 목적과 내용은 대체로 지역의 과제 해결, 지역 내 일자리 창출, 유휴자원의 활용, 경제적 효과의 지역순환 등에 있다. 마을기업은 영리목적과 자원봉사활동 목적 중간 정도의 성격이다. 따라서 경제적 수익보다는 삶의 보람이나 지역공헌 등에 더 의미를 둔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완주군 커뮤니티 비즈니스’의 이해를 위하여 당시의 관련 신문기사를 부분적으로 인용하고자 한다. 기사 제목은 “완주군 '커뮤니티 비즈니스' 농촌의 새로운 활력 찾는다.”이다.

 

“지방에 있는 '지역'을 살리는 지속가능한 대안으로 '커뮤니티비즈니스(이하 CB)'가 주목받고 있다. CB는 그동안 정부주도 지역활성화 사업과 대기업유치를 통한 지역발전전략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지역발전모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역 주민들 스스로가 지역의 자원을 활용하여 비즈니스방식을 통해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고 그 과정이나 결과로 얻어지는 이익을 다시 지역에 환원함으로써 지속가능한 지역활성화를 도모하는 것이 CB의 핵심내용이다. 지난해 3월 18일 창립총회, 5월 14일 법인이 설립되는 등 창립 1년을 맞는 '완주커뮤니티비즈니스지원센터'의 이모저모를 살펴봤다.

 

 

 

▲완주군, CB에서 희망을 찾다

2007년 자치단체장 일본연수를 통해 CB를 처음 접한 임정엽 완주군수는 희망제작소(상임이사 박원순)와 포괄적 MOU를 체결하고 적극적으로 CB를 연구하고 정책과 제도로 받아들이기 위한 절차에 돌입하게 된다.

완주CB센터는 자치단체 단위 전국 최초의 중간지원조직이며 완주군은 작년 8월 농촌활력과를 신설함으로써 통합적인 정책운영과 지원시스템을 구축하게 된다.

 

▲ CB를 통한 지역재생과 농촌활력

완주군의 지역활성화 전략과 정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지역발전 중장기 전략 '약속프로젝트'이다. 생산혁신, 유통혁신, 부채대책, 농촌활력증진, 노인복지 등 5개 분야 12개 시책으로 구성된 '약속프로젝트'는 지속가능한 농업농촌을 위한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두 번째는 CB방식에 의한 지역재생과 농촌활력 프로그램이다.

 

▲ 마을공동체회사 100개 육성

완주군과 완주CB센터는 CB사업으로 마을공동체 회사 100곳 육성을 추진 중이다. 농산물의 생산, 가공, 유통 및 체험관광 등을 내용으로 한 마을회사와 문화, 복지, 교육, 환경 등의 영역에서 다양한 유형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공동체회사를 지역에 100개 만들겠다는 것은 1,000명을 고용하는 회사 1개를 만드는 것보다 10명을 고용하는 100개의 회사를 만들겠다는 뜻이다. 완주군 자체적인 마을공동체 회사 육성전략에 따라 단계적으로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현재 95개의 마을공동체사업이 전개되고 있다.

완주커뮤니티비즈니스센터 김창환 사무국장은 "지역에 대한 새로운 시각, 사람들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 행정과 주민을 비롯한 지역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신뢰를 기반으로 한 촘촘한 관계망을 만들어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면 커뮤니티 비즈니스도 결국 또 하나의 정책수단으로 전락할지도 모릅니다"라는 말로 사업성과에 대한 조급한 기대보다는 긴 호흡으로 지역을 다시 만들어가는 유용한 수단으로 커뮤니티 비즈니스가 활용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전북일보, 2011.04.12.)

 

2) 2009년, 농수산부 공모사업 <신문화공간조성사업>에 선정

 

이러한 기반조성 노력의 결과로 비비정(飛飛亭) 마을을 대상으로 수립한 제안서가 중앙정부의 “신문화공간조성 공모사업”에 선정된다. 2009년이었다. 이 사업은 완주군을 비롯해 강원 횡성, 충남 서산, 충북 옥천, 경북 의성, 제주 서귀포 등 전국 6개 시·군에서 2011년까지 3개년 간 시범 사업으로 추진되며, 연차적으로 국비와 지방비를 포함해 총 28억을 투자하는 사업이다.

완주군은 이 사업에 대한 기본계획 수립과 공식적인 사업추진단을 발족하였다. 이때 명칭을 ‘삼례 비비힐 신문화공간 조성사업’으로 확정하였다. 사업추진단 발족식은 농수산부 도농 교류협력사업인 ‘비비정 달빛놀이’ 행사와 연계해 이뤄졌는데, 도시민들과 삼례 주민들이 함께 마을답사, 삼례농악단 길놀이, 합창단 공연, 한일 마임공연 및 마을 잔치음식 나누기 등을 진행해 뜻깊은 자리가 되었다.

비비힐 신문화공간 조성사업은 완주 8경 중의 하나인 삼례읍 비비정 일원에 총 28억원을 투자해 일제시대에 조성된 양수장을 중심으로 한 농가 레스토랑, 다목적 야외 이벤트 공간과 비비광장 등 거점공간이 조성된다고 예고하였다. 이 외에도 비비정 마을에는 비비 하늘농가 민박, 비비 정원레스토랑, 비비살롱, 비비마루, 비비텃밭, 습지체험장, 호산서원을 활용한 비비 상상공장 등 개별 공간들에 대한 청사진도 제시하였다.

 

 

 

 

이후 완주군 삼례읍 비비정 마을에서 본격적인 커뮤니티 비즈니스형 마을만들기 사업을 통하여 주민들과 함께 농촌마을에 문화공간을 조성하고 지역의 근대문화유산을 연계한 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핵심목표는 마을의 문화자원을 기반으로 마을기업을 만들어 농촌사회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취지이다.

사업초기, 마을자원조사를 시작으로 선진사례지 답사 등의 주민교육을 실시하고 농가레스토랑과 커뮤니티 카페의 시범운영, 음식과 술 만들기 교육 등을 통해 지역문화거점을 운영하기 위한 기초적인 역량을 키웠다. 또한 마을을 더욱 안정적이고 체계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주민 스스로 사단법인 ‘비비정’이라는 조직을 설립하였다.

이렇듯 2009년은 비비정 마을이 농수산부 공모사업에 선정되면서 “지지리도 궁상맞은, 녹두밭 웃머리”라고 자조하던 비비정 마을에 새로운 사건과 뉴스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아래 기사가 당시를 떠올리게 한다.

 

"모두 반갑습니다. 이틀 전엔 동네 이장님이 주민설명회를 위해 마을길을 쓸자고 예고 없이 방송했는데, 모두 나와서 싸리비를 들고 서 있지 뭡니까. 덕분에 저 역시 이번 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해야겠다는 의지가 확고해졌습니다."

 

'2009 신문화공간조성사업 비비힐 프로젝트' 중심에 있는 김영두 비비정마을추진위원장(61). 15일 오전 6시 완주 비비정마을에서 열린 '신문화공간 조성사업 주민설명회'를 앞두고 그는 "'비비힐 프로젝트'에 대한 기대가 남다르다"고 말했다. 비비정 마을이 익산과 전주 사이에 위치해 접근성이 좋고, 만경강 생태자원을 비롯해 비비정, 호산서원, 양수장 등 문화자원을 갖춘 공간이라는 사실을 재평가할 수 있어서이다.

김 위원장은 그간 움츠러들었던 마을 사람들이 이 프로젝트로 인해 이젠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하게 됐다고 말했다. 직업을 찾아 떠난 청년들을 불러 모으고, 귀농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엿본 것.

그는 완주농업기술센터와 공공작업소 심심, 희망제작소가 함께 참여하는 만큼 관과 민, 문화예술인이 함께 머리를 맞대 주민이 상생할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나야 한다며 이번 주민설명회를 계기로 밑그림부터 다시 그릴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본래 빈 집을 활용해 농가레스토랑, 농가 민박 등 문화공간 조성을 염두에 두었지만, 주민들의 의견을 먼저 수렴한 뒤 가장 현실적인 방향을 모색하기 위함이다.

 

3) 마을 내 근대문화유산을 활용한 마을기업의 탄생

 

 

 

 

2012년 12월에는 지역 내 신문화공간이 완공되었는데, 현재 사단법인 비비정이 운영하고 있는 <비비낙안 카페>와 <농가레스토랑>이 그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디지털완주문화대전 ‘삼례 비비정마을’ 항목 일부를 소개하는 것으로 한다.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삼례양수장은 삼례와 익산 지역에 수돗물을 공급했는데, 현재 완주 구 삼례양수장은 등록문화재 제211호로 등재되어 있다. 비비정 맞은편에는 호산서원이 있는데, 언제 세워졌는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흥선대원군 때 철폐되었다가 일제강점기 때 다시 세워졌다. 6.25전쟁 중에 서원 내의 신앙재와 강당이 불에 탔는데 1958년 다시 건축했다. 호산서원의 사당에는 정몽주와 송시열을 비롯한 이 지역 출신 학자들이 배향되어 있다.

2012년 ‘사단법인 비비정’을 만들어 농가레스토랑 비비정, 카페 비비낙안, 작은 양조장, 공동텃밭, 문화예술프로그램 등을 운영하고 있다. 태생적으로 갖고 있던 빼어난 자연경관에 시설이 들어서면서 비비정마을 공간은 세련된 문화공간과 근현대 문화유산이 잘 어우러진 이색적인 공간으로 탈바꿈되었다. 농가 레스토랑은 마을의 할머니들이 재배한 로컬푸드를 이용하여 조미료 없이 손수 조리한 건강한 밥상을 맛볼 수 있다. 비비낙안은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어 아름다운 전망을 간직하고 있다.

비비낙안은 문화공간의 역할도 크다. 비비낙안을 중심으로 세미나와 교육이 이뤄지고, 카페 옆에서 인디밴드 공연과 아트마켓, 로컬푸드 야시장을 열기도 한다. 비비정마을에서 수확한 쌀로 가양주를 만드는 ‘작은양조장’도 마을 빈집에 들어섰다. 쌀과 누룩, 물만으로 빚는, 풍미가 깊고 뒤끝이 없는 전통 가양주를 되살리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교육도 받았다. 결혼사업 또한 탄력을 받아 새로운 소득원으로 주목받고 있다. 낙후되었던 마을이 문화를 매개로 주민들이 즐겁게 소통하고 지역 정체성도 찾았다. 유휴자원을 활용해 마을이 재생되면서 연간 15만여 명의 관광객이 오고, 주민도 20여 명이 늘게 되었다. 또한 어르신들이 80% 거주하던 이곳에 젊은 청년, 예술가, 문화전문가 등이 귀촌해 창업, 컨설팅, 문화 활동을 하면서 마을에 크고 작은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최근에는 2011년 10월 폐교된 구 만경강 철교[등록문화재 제57호]의 근대문화유산으로서의 높은 가치에 주목한 완주군이 4량의 폐열차를 구매, 리모델링을 거쳐 예술 기차를 만들어 좋은 호응을 얻고 있다. 1량은 레스토랑, 1량과 2량 사이 공간은 라이브로 통기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문화예술 공간이 들어섰다. 2량부터는 편의점, 갤러리, 압화 공예작품 전시실, 마지막 4량은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김성식 박사(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 특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