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전벽해 환골탈태, 비비정 마을의 생존記 (3)

4. 김영두 초대 이사장의 비비정 사모곡

 

1) 삼례 2층 한옥집에서 비비정으로 피난살이

 

 

김영두(75세, 1948년생) 씨는 공모 당시 추진위원장을 역임했고, 이후 <사단법인 비비정> 이사장도 역임한 바 있다. 김영두 씨는 삼례신협에서 전무로 퇴임한 후 신협 이사장도 역임하였다.

김영두 씨는 비비정 마을에 현재도 거주하고 있지만, 비비정 마을의 형성배경이었던 안좌리 침수지역 이주민과는 입향 사정이 달랐다. 그의 조부는 삼례초등학교 부근에 있던, 삼례에서 유일했던 2층 한옥집이었다. 삼례 사람들은 익히 아는 집이다. 조부는 정치운동가로서 김구 선생이 당수였던 ‘한독당’ 활동을 하였다. 6·25전쟁이 터지자 조부와 가족은 비비정으로 피난을 나온다. 세 살 남짓 어린 김영두도 가족 따라서 비비정에 들어온다. 미군의 폭격이 심할 때였다. 비비정 산기슭에는 몸을 숨길 수 있는 반공호가 많았다. 폭격을 피해서 숨기도 하고, 우익도 숨고 좌익도 숨어서 화를 피하던 굴이었다.

삼례 2층집이 이때 폭격으로 불타버렸다. 돌아갈 집이 사라졌다. 어른들은 대책이 없었던지 비비정 마을에 주저앉아 버렸다. 조부가 사거(死去)하고, 당시 대장촌초등학교 교사였던 부친마저 병환으로 2남2녀 어린 자식을 남기고 일찍 세상과 작별한다. 아버지 서른넷, 어머니 서른두 살 때 일이었다. 다행히 조부님이 안좌리에 마련한 12마지기 농지가 유산으로 남았다. 비비정 주민들치고는 적지 않은 규모였다.

 

“지금도 가슴 아픈 이야기인데, 홀로된 어머니가 밤에 나를 업고 안좌리로 물을 대러 갑니다. 그때는 수로시설도 없고 농로도 없어서 논두렁 타고 다닙니다. 논에 물을 대려면 윗논부터 채워야 하니까 논에서 날을 새고 그럴 때요. 젊은 여자가 가로등도 없던 시절에 뻘건 후라시 들고 가니 무섭잖아요? 일부러 나를 꼬집어서 울렸다고 하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도 기가 막힌 일입니다. 제가 군대 제대 후에 공무원 시험을 봐서 논산군청에 몇 개월 근무한 적이 있어요. 그때만 해도 청상과부가 농사를 지니까 놀림감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또 내 눈으로도 그런 것을 목격하고 보니, 어머니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앞서더라고요. 공무원 생활을 때려치고 비비정으로 내려왔어요.”

 

험했던 시절, 여성의 인권이란 것도 언감생신이던 시절, 독자였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지만 어머니의 각별한 고생과 여동생들의 희생으로 고등학교라도 교육받은 것에 늘 미안해하던 김영두는,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일할 수 있는 취직자리가 왜 없겠느냐”는, 다소 막연한 판단에도 불구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만경강 둔치에서 자갈 상차를 해본 적도 그 시기였다.

 

2) 비비정 뽕나무와 누에치던 시절

 

그러자 마침 완주군 양잠협동조합에서 직원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나왔다. ‘이거다!’ 싶었다. 합격만 한다면 집에서 출퇴근이 가능한 거리, 전주에 있는 잠업검사소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양잠조합 초봉이 공무원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직원 1기 모집공고가 났습니다. 현재 전주시청 앞, 코아호텔 자리에 ‘전북제사’가 있었습니다. 또 전북대 신정문 안쪽이 다 뽕밭이었고, 잠업검사소, 잠사가 거기에 있었을 때입니다.”

 

그후 소원대로 어머니랑 같이 살면서 오토바이로 전주에 있는 잠업사업소로 출퇴근을 할 수 있었다. 그 당시 비비정도 온통 뽕나무밭이었다. 집집마다 누에농사를 시작하면서 아무리 작은 밭이라도 뽕나무를 심었다, 비비정 수도산에도 온통 뽕나무였다. 그때 심었던 뽕나무가 지금도 더러 자생하고 있다. 당시 누에 생사(生絲, 명주실)는 일본으로 비싸게 수출하던 품목이었다. 같은 평수의 농지라고 한다면, 벼농사보다 누에농사가 대여섯 배나 되는 소득을 올릴 때였다.

 

“밭을 다 갈아엎고 뽕나무를 심었어요. 여기 비비정도 전체가 뽕나무밭이었어요. 봉동 둔산리 산업단지도 다 뽕나무 밭이었고요. 소득이 되니까 다 심었어요. 뽕나무는 한 번 심으면 계속 자라요. 계속 뽕밭이 됩니다. 양잠업이 전성기 때는 완주군청 잠업관련 직원이 열다섯 명이었어요. 각 마을별로 담당자를 정할 정도였어요.”

 

양잠업이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한 자료에 의하면 1974년 한국의 양잠 농가는 48만8000가구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았다. 당시 양잠업 산물인 생사가 농산물 수출의 절반을 차지했다. 그러나 합성섬유 기술이 발달하고 한복·이불 등 비단 수요가 급격하게 줄면서 1990년대 초부터 양잠 농가들은 사실상 수익을 내지 못하였다. 양잠업 자체가 국내에서 사라지는 판국이었다.

 

“일본에 수출하는 양잠업자들이 80년대 말부터는 해마다 싸게 가져가요. 등급을 매겨서 가져가는데, A등급은 빼고 오히려 B등급을 가져가요. 싸게 가려가려고. 생산자들도 꾀가 생겨요. A등급을 B등급으로 떨어뜨리려고 물을 들여요. 좋은 등급을 낮춰서 싸게라도 팔려고. 그래야 조금이라도 빨리 가져가거든요. 고륙지책이지요. 그럴 정도로 1980년대 말부터는 사양길이 되었어요. 여자들이 고생 많이 했어요. 누에 키우느라고.”

 

3) 삼례신용협동조합 근무시절

 

잠업사업소를 다니던 중, 삼례신용협동조합에서 금전사고가 나서 임원이 구속되는 일이 발생했다. 직원을 채용한다는 공고가 나왔다. 그런데 주산3급, 부기1급 이상이라는 자격기준이 있었다. 농고를 졸업한 김영두에게는 낯선 요건이었다. 주경야독을 하였다. 퇴근 후 부기학원, 주산학원을 속성으로 다녔다. 몸이 힘들어 퍽 울기도 했다. 운이 좋게 합격을 했다. 전주와는 비할 수 없이, 한 동네나 마찬가지인 데서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다. 삼례신협 재직시에 전국 최초로 ‘대우다마스’ 자동차를 도입해 이동금고를 시행했다는 것을 보람으로 여겼다.

 

“상인들이 가게를 비울 수 없으니까 우리가 예금을 받으러 다녀요. 그것이 이동금고입니다. 제가 대우 다마스를 이용해서 이동금고를 만들었어요. 그때는 전산화가 안 되던 시절이라 무전기만 들고 다녀요. 가령 A가 만원을 예금하면 무전으로 그 사람 통장을 확인하여 기재하는 방식으로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미개하지만 그 방법밖에 없었어요. 신협의 장점이 그거예요. 상인들이 가게 때문에 은행에 못 나오거든요. 우리가 매일 쫓아다니는 거지요.”

 

그는 때로 고지식하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 필자가 보기에도 원칙주의자이고, 정의를 앞세워 판단하기 때문에 그럴만하다고 판단되었다. 그는 신협에서 근무할 때나 이사장일 때도 신협은 본래 취지대로 운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즉 ‘담보’가 아니라 ‘신용’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상부상조하는 것이 신협정신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협동조합은 작은 규모로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협이 단기순익을 많이 낸다는 것이 결코 자랑할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신협은 소상공인들을 지원하는 협동조합이어야 하고, 수익이 발생하면 이자를 낮추는 등 조합원들에게 이익을 환원하는 것이 신협 정신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애초 메리 가브리엘 수녀가 포교차 한국에 들어온 뒤, 가난한 사람을 돕는 차원에서 시작한 사업이 신협운동이니, 설립 당시의 정신과 이념을 지키는 것이 운영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메리 가브리엘은 이 땅에 신협을 도입하고 뿌리내린 선구자로 존경받는 수녀이다. 지난 2020년은 한국신협운동 60주년을 맞이한 해였다.

 

4) ‘사단법인 비비정’이 탄생하기까지

 

 

<신문화공간조성사업> 선정 당시의 마을 여건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인구 38명 중에서 9명이 독거노인이었다고 한다.

 

“저는 홀어머니와 살았고 집안이 불행했기 때문에 동네 어른들에 대해서 남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우리 조상들, 부모님들은 가난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어요. 우리 세대만이라도 비비정이 가난에서 탈피할 방법이 없을까를 계속 연구했어요. 후세 사람으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모래자갈 채취하거나 누에농사를 하거나 갈수록 수익성이 떨어지고, 반면에 다른 분야는 인건비가 올라가니까 육체노동이 가능한 사람들은 다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어요. 마을에 일자리가 있으면 출향민들이 돌아올 수 있을 텐데, 일자리가 있다면 자손들이 독거노인을 홀로 두지 않을 텐데,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삼례신협 이사장으로 재직할 때 기관장회의라는 기회가 있어요. 임정엽 군수한테 매달렸어요. ‘비비정이라는 마을이 있다. 우리 마을 좀 살게 해줘라. 비비정같은 빈촌을 방치해두고 또 군수에 나가려고 하느냐?’고 막말도 하고 그랬어요. ‘그런 마을이 있냐?, 한번 가보자’고 하시더라고요. 군수가 우리 마을에 다녀간 뒤부터 생각이 달라져서 공모사업에도 연결해 주고, 박원순 시장이 운영하던 희망제작소도 연결해 주더라고요. 기회가 주어졌지요.”

 

재단법인 희망제작소하고 공모에 참여하기 위해서 열심히 준비했다. 공모사업을 준비하는 추진위 시절이었다. 서로 견해가 맞지 않을 때도 있었다. 김영두는 ‘배고픔부터 면하는 수익사업을 먼저 하자’고 주장하고, 희망제작소는 ‘신문화공간조성사업 취지에 맞아야 한다’며 제지하는 식이었다. ‘문화사업도 일단 배는 채워야 할 것 아니냐?’고 재반박하고, 그렇게 옥신각신하면서 1년여 정도 준비기간을 거쳐 농수산부 공모사업에 응하게 되었다. 첫 제안서 발표 때는 역시 공모사업 취지에 맞지 않는다며 반려되었다. 수정 후 재차 발표한 뒤에야 선정되는 곡절도 겪었다.

 

“우리 마을이 비비정 정자와 수려한 풍광, 일제시기에 만든 양수장과 정수장, 만경강변, 호산서원 등 역사문화자원이 존재하다 보니 ‘신문화공간조성사업’하기에 적지라고 판단하고 완주군에서도 권유를 했어요. 그래서 우리도 추진위원회를 발족하게 되었지요.

군에서 공모전 교육도 시키고, 희망제작소에서 좋은 아이디어도 내고, 전문인력인 사무국장도 보내주고, 공모전 현장발표 때도 우리 주민이 3분의 1, 희망제작소가 3분의 2 정도 담당했어요.”

 

5) 마을기업 ‘(사)비비정’의 현재

 

 

2021년 11월 현재, ‘사단법인 비비정’에서는 <카페 비비낙안>과 <농가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 공모사업에 선정되고 신문화공간이 준공된 지도 벌써 20년이 지났다. 애초의 다양했던 아이템은 다 정리가 되었고, 위 두 공간만 마을기업으로 운영하고 있다. 그 사이에 60대 여성 주민들은 80대 고령자가 되어 직원으로 근무하기 힘들어졌고, 외지에 살던 출향민들이 더러 귀향해 마을기업에 참여하기도 한다.

두 곳의 사업장에서 15개의 일자리가 창출되었다. 초기에는 커피전문가를 매니저로 두고 바리스타 교육도 받았다. 이 마을 출신 대학생 여성 3명이 바리스타 교육을 받고 카페에 근무하면서 초기에 큰 공을 세웠다. 그들은 현재 각자의 직업현장으로 떠났다. 애초에는 두 곳에서 일하는 직원은 마을 거주민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주민들이 경작한 농산물은 시가의 1.5배를 주고 매입하였다. 역시 유기농 생산물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농가레스토랑에서 음식을 만들고 서빙을 하던 여성들은 고령자가 되면서 상당 수가 은퇴하였다. 현재 직원 중에는 마을 주민이 3분의 1, 외지인이 3분의 2 정도 구성되어 있다.

카페는 이미 지역사회나 여행자들에게 명소가 되있다. 오픈할 때보다 공간을 더 키웠다. 풍광이 뛰어난 곳이다 보니 입소문이 퍼졌다.

그러다가 2020년부터는 코로나19의 급습으로 특히 농가레스토랑이 휘청거리고 있다. 2022년 3월 현재까지도 적자가 심하다.

 

“선정된 이후에 농가레스토랑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 원점 재검토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동네 할머니들이 잘할 수 있는 향토식으로 가자고 했는데, 희망제작소는 전국적으로 보편성을 지닌 음식으로 가야한다고 하더라고요. 이름은 레스토랑이지만 메뉴는 ‘가정식 백반’입니다. 음식 선정할 때도 시골음식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쉽지 않더라고요. 주민들이 각자 만든 음식을 출품하여 전문가들이 심사하는 과정도 겪었어요. 홍보 차원에서 완주군 기관장들을 초청해서 시식도 하게 하고, KBS ‘6시내고향’이나 ‘아침마당’에도 출연하고 했더니 외지인들이 줄을 서더라고요.”

 

비비정 신문화공간의 소유주는 완주군이다. 사단법인 비비정이 임대료(년 5백만 원)를 내고 자체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수익금은 회원들에게 경로수당을 드리거나 시설에 재투자하고 있다. 현재의 운영실태와 수익성을 묻자 김영두 초대 이사장은 다음과 같은 고민을 털어놓는다.

“카페는 문제없이 잘 돌아가고 있다. 농가레스토랑 때문에 적자다. 적자를 누적시킬 수 없으니까 직원을 줄여가고 있다. 그런데 직원을 줄이면 음식과 서비스 질이 떨어지게 되어 있다. 그러면 소문이 안 좋아질 게 뻔하고, 수익은 더 줄어들 것이고. 코로나 이후로 직격탄을 맞고 있어서 악순환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 현 이사장이 고민이 많다. 직원도 동네 사람들로만 10명이 넘었었다. 동네 노인들이 임자 없는 공유지에 채소를 키워서 레스토랑에 팔면, 작은 돈이지만 재미가 있었다. 코로나가 풀려 빨리 원상회복되길 바랄 뿐이다. 농가레스토랑은 야외결혼식장으로도 명소가 되어가던 참이다.”

 

 

김성식 박사(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 특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