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전벽해 환골탈태, 비비정 마을의 생존記 (4)

5. 만경강과 살아온 이영이의 ‘가난타령’ 한평생

 

 

이영이(85세, 1938년생) 씨는 태어난 삶터가 비비정이다. 결혼도 비비정 총각이랑 해서 지금껏 비비정에 산다. 친정아버지도 시아버지도 마찬가지로 안좌리에 사셨다. 안좌리가 침수피해를 입자 비비정으로 이주하였고, 그 후손이 된 이영이씨는 비비정에서 태어난다. 안좌리에 대한 그의 기억은 전언(傳言)일 뿐이다.

 

“그전에는 안좌리에서 농사를 지었는디 한물이 졌어. 물이 논으로 쏟아져서 논을 메꿔버렸어. 그러니 빚내서 장리쌀로 살았어. 거기가 비만 오면 한물져버리는 디여.”

 

부모나 조부가 안좌리에서 이주했다는 점에서 비비정 사람들의 기억은 거의 동일하다. 그는 앞에서 인용한 것처럼 모래자갈 채취나 고기잡이 등에 대해서 기억을 상세히 구술해 주었다. 어린 시절에 겪었을 해방이나 전쟁에 대한 기억을 물었다. 참혹한 가난이 딸려 나왔다.

 

“내가 여덜인가 아홉에 해방되고, 열세 살 때 전쟁 났어. 나는 가난해가지고 전쟁 때 여기서 안 살았어. 우리 엄마가 딸도 하난디 넘의집 보냈어.”

 

절대가난의 시절, 자식들은 또 거듭거듭 생긴다. 먹을 것 없는 입이 무섭다. ‘입 하나라도 던다’고 남의 집으로 보낸다. 여아는 심부름꾼이나 식모로 나가고, 남아는 꼴머슴으로 나간다. 어린 나이에 학교는 가고 싶은데 형편상 꿈도 못 꾼다. 누군가가 난데없이 나타나 학교 보내준다며 애를 꼬드겨서 데리고 간다. 이미 엄마와 수작을 끝낸 사람이다.

 

“학교갈쳐 준다고 해서 동산촌 화전이라는 동네 부잣집으로 갔는디, 학교 갈쳐주간디? 심바람시키고, 청소시키고, 불 때고, 그렇게 살았지. 갈쳐준다고 하니까 엄마가 나를 보냈는디, 그 집 가니까 쟁기질하는 아저씨 둘, 부엌일하는 아줌마 있고 그려. 근디 갈치긴 뭘 갈쳐, 심바람하고 불 때라고나 하지.”

 

그의 나이 열 살이나 되었을까. 어머니라고 그 말을 믿었을까? 애를 보내거나, 데려가는 어른들끼리 둘러댄 말일 것이다. 그는 결국 평생 국문을 깨치지 못했다. 어려서는 남의 집살이 하느라 배우지 못했고, 집에 와서는 먹고사느라 배우지 못했다.

 

“전쟁 때는 왕궁 부잣집에 살았어. 근디 그 집 아저씨가 어떻게 살았냐면, 허청이 잿간인디 부잣집이라 잿간도 커. 재가 겁나게 많은데 그것을 따독거려서 단단하게 하고, 그 속에다 굴을 파고 그 안에 멍석 깔아 놓고 숨어서 살어. 그 안에서 노래도 갈치고 그러더라고.”

 

이 기억에는 어떤 내막이 숨어있을까. 전쟁통에 군대를 기피한 사람일까, 인민공화국 시절에 몸을 피한 우익인사일까. 수복 후에 부역자로 몰린 좌익인사일까. 그 안에서 노래를 갈쳤다는 것은 어떤 조화인가. 어린 ‘영이’의 기억이라 맥락이 존재할 리 없다.

그러다 음력 8월, 추석을 쇠러 열세 살 영이는 비비정으로 왔다. 비로소 전쟁을 실감할 수 있었다.

 

“우리집에 와보니까 우리집도 굴 파놓고 그러더라고. 이 동네는 인공 때 굴 파놓고 산 사람이 많어. 언덕만 있으면 다 굴 파놓고 살았어. 우리는 막내 외삼촌이 서울에서 순경이었어. 그런다고 동네 놈들이 우리 오빠랑 엄마랑 땅굴로 데려가서 주전자로 물키고 그랬당게. 자치가 자치 잡아먹었당게, 그때는.”

 

본인 가족이 당한 일이라 왕궁에서보다 기억이 선명하다. 전쟁 초기 3개월 남짓의 인민공화국 시절에는 당연히 좌익이 득세한다. 사실 좌우익 세력의 대립은 일제시기 내내 이어졌다. 해방 직후부터 경쟁과 대립이 본격화되고, 전쟁이 터지자 살육으로까지 격화되었다. 비비정 마을의 위 상황은 1950년 7월 초부터 9월 하순까지 3개월 남짓의 인민공화국 시절에 벌어진 행위들이다.

1950년은 9월 26일이 추석이다. 이 무렵에 인민군과 적대세력은 후퇴를 명령받는다. 인공 시기에 우익세력을 색출해 분주소에 집단 감금해 놓은 상태에서 갑자기 퇴각 명령이 하달된다. 각 면단위 인민위원회는 이들에 대한 처리를 현장 책임자들이 결정하였다. 상부의 지시가 ‘알아서 처리하라’였기 때문이다. 참혹한 집단학살이 전국에서 자행된 시점이다. 그런데 삼례에서는 이런 집단학살극이 벌어지지 않았다. 이 지역 면당위원장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이영이가 말하는 ‘자치가 자치 잡아먹었다.’는 말은 이 시기, 혹은 전세가 역전되어 좌익세력이 인민군을 따라 북상하거나,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 활동하던 시기의 정국을 집약적으로 담아낸 표현이다. 즉 정규군들 간의 전쟁이 아니라 좌우익 민간인들 간의 쟁투를 말한다. 그들은 각자가 주도권을 장악한 시기에 상대에 대한 보복살육과 테러, 고문 등 어떤 재판과정도 없이 온갖 불법적 폭력을 자행하였다. 좌우익으로 나뉘어 벌어진 참상을 비비정 마을도 피해 가지 못한 것이다.

이영이가 비비정으로 돌아와서 본 충격 가운데는 이 외에도 더 있었다.

 

“물문 밑에 집이 있었는디 폭격 맞아가지고 없어졌어. 비비정 물문 보는 디에 양수장이 있었는디 6․25 때 폭격 맞아서 없어졌어. 우리 시어머니 살던 집에 단스(서랍장)가 있었는디, 비행기 폭격 때 총맞아 가지고 구멍 뚫어지고 그랬어. 비행기가 총을 쐈어.”

 

전쟁 시기에 제공권은 미군 것이었다. 미군의 폭격은 누구한테나 공포의 대상이었다. 당시를 기억하는 고령자들은 폭격 비행기를 ‘호주기’*라고 말한다. 호주기가 나타나 삼례철교를 폭파하려 하였으며, 기총소사까지 했다는 것이다. 민간인을 향해서 말이다.

현재도 비비정 마을이나 철교 근처에서 기총소사한 총탄 흔적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김영두 씨는 이에 대해서 “전라선 철교를 폭파하려고 폭격을 했는데 당시만 해도 명중률이 떨어져서 폭파가 되지는 않았다고 한다.”고 말한다. 그가 비비정 마을로 피난을 오기 전에 읍내에 살던 2층 한옥집은 ‘호주기’의 폭격으로 불타버렸다.

 

 

이영이의 남편도 일찍 곁을 떠났다. 남편 스물여덟, 본인 스물세 살 때라고 한다. 빨라도 너무 빠른 사별이다. 남편은 독자였다. 시어머니는 갓 시집온 며느리한테 “애기 낳기만 바래가지고 여섯을 낳았다.”고 한다. 어린 각시가 어린 자식 여섯을 키워야 할 운명은 너무 가혹하다. 하필 시어머니도 일찍 상부(喪夫)한 처지라 그런지 ‘며느리 불쌍한지도 몰랐다.’고 한다.

이영이는 “꼬치꼬치 물으면 복잡하다. 대충 물어보라.”고 말하며 웃는다. 이어지는 삶도 고단할 뿐이었다. 모심는 철이면 부인단(婦人團) 따라서 모심으러 다니고, 모래자갈도 채취하고, 누에 치고, 시라시 잡고, 우렁 조개 잡고, 심지어 공사판에 ‘장도리로 못 빼러’도 다녔다. ‘자식들 눈이라도 뜨라고’ 가르치기 위한 까막눈 이영이의 한평생이, 그러하였다.

 

* 6⋅25 때 폭격기를 민간의 어른들은 가끔 ‘호주기’라고 말한다. ‘호주기’라는 표현에는 해프닝이 담겨있다. 알다시피 이승만 대통령 부인은 오스트리아 국적의 프란체스카 여사다. 당시 오스트리아와 오스트레일리아를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었을까. 대통령 처가댁의 나라에서 한국을 지원하기 위해서 비행기를 보냈다는 것이며, 그래서 ‘호주기’라고 불렀다. 여사도 ‘호주댁’이 되었듯이. 실제로 폭탄을 투하하고 기총소사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6⋅25 때 달리는 기차를 향해 기총소사한 기록은 얼마든지 많다.

 

 

김성식 박사(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 특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