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 새끼친다는 땅, 석전리(石田里) 마을사 (1)

무수한 실개천이 만들어낸 모래땅

석전리는 말 그대로 ‘돌밭’(石田)이라는 지명이다. 현재는 일부 텃밭을 제외하고는 밭을 거의 볼 수 없다. 그러나 100년 전만 해도 밭이 천지였다. 달리 밭이 많았던 것이 아니다. 지대가 높아서 물이 닿지 않으면 밭이고 낮아서 물이 들어가면 논이었다. 석전리는 우산천과 우동천이 합수되는 곳으로, 큰비가 쏟아지면 수로가 좁아서 배수가 원활하지 않았다. 그러니 논이며 취락지로 물이 쏟아졌다. 제방이 재래식이던 시절에는 홍수에 제방도 터져 나갔다.

삼례 ‘동부리’지역 토질은 사석토 지대가 매우 광범위하다. 석전리 북쪽 구릉성 야산 아래쪽, 가령 청등, 정산, 학동과 신정리 일부에 해당하는 점질토지대를 제외하면 전체가 사석토이다. 1990년대에 가장 왕성했던 육상모래 채취는 다 사석토지대에서 이루어졌는데 신탁리, 석전리, 하리, 구와리, 신금리 등 채취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현재 삼봉신도시 택지구역으로 수용된 곳도 ‘모래거리’를 비롯하여 완전한 사석토 지대이다.

 

 

 

석전리에는 어떠한 자연현상으로 사석토지대가 형성되었을까? 우산천이 수백 년을 범람해 왔다고 해도 수로의 폭이 좁고, 구불구불해, 범람시에 모래자갈이 휩쓰는 영향권은 한계가 있다. 그렇게 볼 때 이곳의 사석토 형성이 단지 우산천의 영향으로만 볼 수는 없다.

 

그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추정을 해볼 수 있다. 첫째, 고산천의 본류가 현 위치보다 더 북쪽으로 흐르다 오랜 시간을 두고 남진(南進)했을 가능성이 있다. 즉 봉동읍 봉실산과 배미산을 잇고 둔산리에서 구암리로, 다시 삼례 수계리와 석전리, 신금리 북쪽으로 이어지는 구릉 가까이 고산천이 흐르다가 서서히 남진해 현재의 위치까지 이르렀을 것이라는 점이다. 봉동과 삼례 일대에서 발굴되는 청동기시대 유물의 산포지역을 보면 대개는 산기슭을 끼고 있다는 공통점을 알 수 있다. 이곳이 취락지라는 점은 강을 끼고 있다는 사실과 부합된다.

둘째, 만경강 상류인 고산천이 제방이 없던 시절에는 수많은 가닥의 세천(細川)이 동에서 서로 흘렀다는 사실이다. 그 세천 가운데 가장 큰 규모가 우산천이라고 할 수 있다. 봉동읍 전지역과 삼례읍 동부리 쪽으로는 오랜 세월 동안 상당한 세천이 흘렀다. 이 세천 가운데는 평소에 건천이었다가 홍수시에 활성화되고, 또 수시로 범람하는 하천도 많았을 것이다.

2018년에 제출된 「봉동읍 장기리 일대 조사보고서」를 보면 이를 입증하려는 시도를 하였다.1)  ‘국가기록원 지적(地籍)아카이브’에 보존된 자료 중에서 장기리 일대를 검색하였다. 이 지적도는 1915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에서 제작한 자료이다. 이 지적도면을 A4로 출력하고 전면을 이어 붙였다. 그 결과 당시 장기리 일대에서, 동에서 서로 흐르는 수많은 가닥의 세천들이 실핏줄처럼 다 드러났다.

 

 

 

“청동기 유물이 발견되는 봉실산 자락의 여러 마을들, 율소리, 은하리, 은상리, 우산 등지에 마을이 형성될 당시 고산천의 물줄기는 지금처럼 제방을 따라 흐르는 방식이 아니었을 것이 분명하다. 제방이 쌓이고 하천의 물길이 봉동의 동남쪽으로 형성되기 전까지는 고산천의 물이 넓은 들녘으로 흘렀을 것이다. 이 지적도면은 하천의 형성과, 상대적으로 대지가 하중도(河中島)처럼 물에 쓸려온 토사가 쌓여 육지가 되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2)

 

이렇듯 수많은 세천이 흐르면서 홍수에 범람하게 되면 토사가 쓸려와 충적지(沖積地)가 형성된다. 정착민들은 이런 곳을 개간하여 농지와 취락지를 마련한다. 홍수가 지나가면 하천 수로도 변형되기 일쑤다. 하천이 변형되면 기존의 수로는 하천부지로 남아 역시 개간 대상이 된다. 이렇듯 장시간을 두고 시행한 하천부지 개간의 역사가 봉동, 삼례평야 형성의 역사와 다르지 않다. 이 시절 충적토 개간의 역사를 보여주는 증거물이 이른바 ‘뙤똥배기’이다.3) 석전리에서는 1987년 경지정리사업 때 마지막 ‘뙤똥배기’가 소멸되었다.

일제강점기 제방이 축조되면서 하천 유로가 안정되자 기존의 세천은 마른하천이 된다. 이러한 곳을 그냥 둘 리 없다. 마치 금을 찾아 몰려든 미국 서부의 개척사처럼, 경작지를 찾아 나선 사람들한테 봉동, 삼례 일대가 한때는 노다지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만큼 하천부지 등 황무지가 널려있었다는 뜻이다. 그런 면에서 삼례 동부리는 황폐한 충적지를 대상으로 한 농경지 개간의 역사적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증거물이 지상에서는 다 사라졌을 뿐이다.

 

석전리 지질층에 관해 근래에 직접 경험한 사람의 증언이 자료에 남아있다. 1987년도에 전북농지개량조합이 시행한 「석전지구 경지정리사업」 후기를 기록한 다음과 같은 대목이다.

 

“석전・봉동지구 경지정리사업지구의 지명을 보면 ‘돌밭’(石田)이다. 추진시 애로는 조약돌과 모래였다. 약 500ha에 이르는 구역 전역의 논 작토심이 약 20cm 내외로 극히 토심이 얇게 형성되고, 그 이하 토층은 모래와 자갈로 구성되어 있어, 골재 채취업자들의 눈에는 건설공사에 소용되는 모래자갈의 보물창고였다. 주변 골재채취업자들은 나름 콧노래가 나왔다. 전북농지개량조합의 공사감독진에서는 그런 내용을 간파하고, 소장을 비롯한 감독위원들은 공사현지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작토심 이하의 모래자갈을 지켰다. 골재 채취업자들 임의로 채취하도록 방치하면 작토심 이하의 토질변화로 영농차질은 물론 지하수위 변동으로 예기할 수 없는 민원에 직면할 것이며, 토석채취에 관한 법률에 저촉되어 당장 경찰관의 조사를 받아야 하는 사회적 문제로 발전되는 것을 방지하였다.”4)

 

석전리는 본래 전주군 오백조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석전리 상신정리, 삼계리, 정산리, 학동리, 청동리, 신정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리내 중심 마을의 이름을 취하여 석전리라 하였다. 원석전(元石田)은 법정 리와 구분하기 위하여 '원(元)'을 덧붙인 지명이다. 남석전(南石田)은 원석전의 남쪽에 있어서 부르는 지명이다. 이곳에는 세 개의 우물이 있어서 삼정(三井. 세샘거리)이라는 지명도 있었다.

신정(新亭, 新井)은 웃신정(상신정)과 아랫신정(하신정)으로 구분된다. 신정은 아랫신정 앞에 큰 정자나무가 있어 일컫던 이름이라고 한다. 하신정 남쪽에 삼계리, 동남쪽에 새터라는 마을이 있다. 새터는 해체되었다.

청등(靑登)은 상신정 북쪽에 있는 마을인데, ‘상신정의 좌청룡(左靑龍)’ 등성이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일컫는 지명이라고 한다. 이밖에 정산(井山)은 뒷산 아래 샘이 있어 생긴 이름이다. 산에 대한 명칭은 따로 없다.

 

 

 

1) 김규남 외, 『봉동 멍에방천과 장기리 가랑가랑 냇가랑-봉동읍 장기리 일대-』, 완주문화도시추진단, 2018, 93~97쪽 참조.

2) 김규남 외, 앞의 보고서, 97쪽.

3) ‘뙤똥배기’를 부르는 명칭이 다양하다. 신탁리에서는 ‘뚝색이’라고 하고, 하리에서는 ‘뚝생이’라고 불렀다. ‘뙤똥배기’가 일반적이다.

4) 이종진, 『만경강의 숨은 이야기』(ᄒᆞᆫ맘, 2015) 186쪽. 

 

 

김성식 박사(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 특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