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석전리 경지정리사업과 수로의 변화
석전리는 오른쪽에 수계리, 왼쪽에 신금리를 두고 있다. 또 북쪽에는 봉동읍 구암리가 있고, 남쪽에는 삼례읍 구와리가 있다. 삼봉신도시가 삼봉로 건너편에 들어섰고, 삼봉로 남쪽에 위치한 삼례동초등학교도 석전리 남신정 구역이다. 왼쪽 우동천 일부 지역도 석전리 구역이다.
현재 석전리를 지나는 가장 큰 수로는 우산천(제1도수로)이다.5) 석전리 남단을 동에서 서로 횡단하는 우산천은, 석전리 맨 왼쪽에서 우동천과 합수한다. 우동천은 북쪽 구암리에서 남쪽 석전리로 흐르는데, 석탑천이라고도 부른다. 따라서 석전리는 동에서 서로 흐르는 우산천과,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우동천이 합수되는 곳이고, 이곳에서 하나의 몸이 된 하천은 우산천이라는 이름으로 신금리를 지나 삼례리 찰방다리를 건넌다. 찰방다리를 건너는 구간을 ‘독주항’(犢走項)이라고 하며, 독주항을 빠져나온 후 ‘대간선’ 이름으로 옥구저수지까지 치닫는다.
그런데 우동천과 우산천의 현재 위치와 모습은 모두 1987년 「석전지구 경지정리사업」의 산물이다. 경지정리사업 이전만 해도 두 개의 하천은 심하게 곡류하는 사행천(蛇行川)이었다. 직선화된 현재의 모습도 이때 새로운 하천구간을 신설해 유로를 이전시킨 결과이고, 하천 폭도 이때 대폭 확장하였다. 이러한 수로 개선사업이 석전리 경지정리사업 때 병행됨으로써, 장마철이나 호우시 상습 침수지역이었던 석전리의 고질적인 자연재해가 완전히 해소되었다. 1987년에 시행된 석전지구 경지정리사업 개요는 다음 <표>와 같다.
<표> 석전지구 경지정리사업 개요
3. 원신정 농사여건의 변화
1) 경지정리사업 전과 후
원신정은 웃신정리(상신정)와 아랫신정리(하신정)로 나뉘었다. 삼봉로에서 원신정 진입로(석전로)로 들어서면 좌우에 새로 생긴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진안 용담댐 수몰민들이 이주해 형성된 마을이다. 석전리에 용담댐 수몰민들이 조성한 마을이 여기뿐만은 아니다. 원석전 마을 주변에 산개되어 있다. 2020년 무렵에 이곳을 남신정이라 하여, 행정분리하였다.
남신정을 지나면 곧 우산천을 만난다. 지역 주민들은 ‘수리조합또랑’이라고 부른다. 이 수로를 건너는 다리가 신정교(新亭橋)인데 1987년에 설치되었다. 삼봉로에서 진입하는 도로가 석전로인데, 이곳까지의 거리가 약 500미터이다. 신정교를 건너자마자 조성된 마을이 아랫신정이다. 석전로를 따라가면 웃신정과 곳곳에 조성된 수몰민 마을이 자리한다. 석전로 북쪽 끝에 청등마을이 위치하며, 신금리에서 들어오는 신수로와 만난다.
“어른들 말씀 들으면 웃신정리 아랫신정리는 한 동네였대요. 근데 중간에 화재가 나서 동네가 둘로 나뉘었대요. 동네 가운데서 불이 나는 바람에요. 우리가 보지는 않았고 어른들한테 들은 이야기요. 여기는 아랫신정이에요. 웃신정이나 아랫신정이나 폐가가 많아지다가 진안 수몰민들이 이사 오는 통에 동네가 커졌어요.”6)
“(익산-장수간)고속도로 밑으로 들어오면 양쪽에 있는 마을이 다 수몰민 마을이에요. 그전에는 거기에 동네가 없었어요. 새로 만든 마을이에요. 거기 말고도 논에다 집을 지어서 여러 뜸이 생겼어요. 수몰민 뜸. 여기는 경지정리한 논이라 논에다 집을 못 짓는 곳인데, 정부에서 특혜를 줬어요. 수몰민이 100여 가호가 되어서 삼례읍 내에서는 가장 큰 동네가 되었어요.”
1987년 경지정리사업으로 석전리 영농환경은 상전벽해가 되었다. 가장 큰 변화는 농경지와 가옥의 상습침수 해소와 관개(灌漑)의 편리함이다. 석전리는 큰비 올 때마다 범람과 침수가 반복되었다. 옛날부터 물 사정은 좋은 곳인데도, 역설적으로 침수가 빈번했다. 원인은 큰비 올 때 우산천과 우동천의 불어난 물이 빠져나가지 못하고 제방을 넘어 농경지와 가옥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때문이다.
1987년 경지정리사업 때 우산천 수로를 확장함은 물론이고, 자연하천을 인공하천으로 개수하는 과정에서 직선화와 유로변경을 시행되었다. 특히 봉동읍 구미리를 지나는 수로에서부터 삼례읍 수계리, 석전리를 지나는 구간을 전면적으로 개량하였다. 원신정의 경우 우산천이 본래 웃신정과 아랫신정 사이로 구불구불 곡류(曲流)하였다. 현재는 아랫신정 남쪽으로 우산천이 지나간다. 다시 말하면 아랫신정 뒤(북쪽)로 지나던 하천을 동네 앞(남쪽)으로 옮겨 삼봉로 가까이 새로운 수로를 만든 것이다.
우산천을 삼봉로 가까이 옮긴 이유는 직선화하는 데 적지이기도 했고, 또 삼봉로 남쪽의 수계리, 신탁리, 석전리 일부 등 삼봉로 남쪽지역 경지정리사업을 염두에 둔 포석이었다.
“옛날에는 폭우가 쏟아지면 침수가 되어서 물바다가 되었어요. 지금 동네 앞으로 있는 수리조합이 본래 뒤에 있었거든요. 옛날에는 마을 한참 뒤에 있었는디, 비가 오면 배미산 골짜기에서 쏟아지는 물이 우동천 물이랑 다 한물지면 빠져나가지 못하고 논을 뒤덮고, 동네로 쏟아지고 그랬어요. 또랑이 갈지(之) 자로 생겨서 물이 쉽게 못 빠져요. 옛날 수리조합 또랑은 수계리부터 동네 뺑 돌아서 웃신정리 앞으로, 아랫신정리 뒤로 지나갔어요. 그런게 홍수나면 동네가 다 침수되지요.
경지정리하면서 봉동 구미리부터 물길을 완전히 바꾸었어요. 없던 물길을 새로 만든 거요. 본래 있던 하천부지는 평 쳐가지고 논으로 개답해서 다 불하했어요. 옛날에는 자연하천이었어요. 왜정 때 자연하천을 수리조합으로 만들었어요.”
일제강점기 때인 1920년에 대아저수지가 착공된다. 사업주체는 임익수리조합이고, 조합장 후지이 간타로(藤井寬太郞)인데, ‘조선의 수리왕’(水利王)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1922년에 대아저수지가 완공된다. 동시에 추진한 수리사업이 ‘대간선도수로’ 공사였다. 고산면 어우리보에 취수문을 설치하였고, 기존의 우산천을 확장, 개수하였다. 어우리부터 삼례 후정리에 이르는 약 15km가 우산천 구간이다. 앞에서 최성렬이 구술한 인용문은 이 내용을 설명하는 것이다.
경지정리사업 이전, 우산천 물로 농사짓기가 수월하지 않았다. 하천 폭이 좁은데다가 구불구불한 사행천이고, 용수를 끌어대기 위한 지선(支線) 수로가 매우 제한적인 상황이었다.
“옛날에는 수리조합 물이라도 물 대려면 애로사항이 많았어요. 넘의 논 거쳐서 대야 하고, 냇가랑도 풀이 꽉 차서 물이 잘 안 내려와요. 그래서 해마다 똘역사(役事)를 하고 농사를 지어먹었어요. 물 대기 위해서 높은 디는 중맥이 대고 막어요. 물을 막는 것을 중맥이라고 해요. 아랫논 주인이 와서 중맥이를 터버리면 싸움이 되고 그랬어요. 넘의 논 댄 후에 우리 논 대야하니까 사정사정해야 하고, 굉장히 괴롭고 아쉽고 그래요.”
‘넘의 논에 대야 우리 논에 댄다.’는 말을 필자는 잘 이해하지 못하였다. 수로에서 물꼬를 열면 물이 자연스럽게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다. 듣고 보니, 우산천에서 지선이 가닥가닥 내려와야 하는데 일단 지선이 극히 소수이다. 용・배수로가 따로 없다. 지선이 길지도 않았다. 본 하천에서 가까운 일부 논을 제외하면, 물대기는 윗논을 채우고 아랫논으로 내려가는 방식이었다. 모를 심으려면 써레를 해야 한다. 윗논이 써레질을 마쳐야 물을 내려준다. 아무리 관행적인 물대기였다고 하지만 기다리는 농심(農心)은 타들어 간다. 논의 모양도 규격이 없는 다랭이논이고, 윗논에서 물이 내려올 수 있도록 계단식 층을 이룰 수밖에 없다. 애초부터
논은 왜 다랭이논이였을까? 대개는 밭을 논으로 개답했기 때문이다. 지대가 높아 물을 대기 힘든 곳은 밭이었다. 그래도 호밀, 고구마, 서숙 등 밭곡식류를 재배했다. 조선후기 이앙법이 도입되고 수리기술과 농사기술도 발전하면서 밭을 낮춰 논으로 개답해 나갔다. 본인들이 할 수 있는 노동력 범위 안에서 논을 만들었다. 그러니 정형의 농지가 될 수 없다. 부정형의 층위가 진 다랭이논이 형성된 배경이 그러하다.
1986년 가을 추수를 하자마자 석정리 경지정리사업이 시작되었다. 경지정리사업은 추수 직후에 실시하는 까닭에 어디나 간에 사업착수가 11월이다. 통상적으로는 가을 착수, 이듬해 봄 완공이다. 그러나 「석전지구 경지정리사업」은 봉동읍과 삼례읍 일원에 해당하는 사업으로 범위도 넓은데다가 우산천과 우동천 개수공사를 포함하고 있어서 만 1년이 소요되었다. 그래서 1987년 11월 11일이 완공일이 되었다.
2) 석전리 ‘뙤똥배기’
앞서 살펴본 것처럼 석전리 들판 주위에는 ‘뙤똥배기’가 있었다. 마지막 뙤똥배기는 1987년 경지정리하면서 사라졌다. 뙤똥배기는 이 지역 최초 정착민들이 농지조성을 하면서 배출된 집념의 구성체이다. 또 홍수가 몰아치면서 쓸려와 농지를 뒤덮은 토사를 다음 세대들이 논으로 개답하면서 들어내고, 깎아내고, 쓸어낸 토사를 쌓아 놓은 부산물이다.
“뙤똥배기는 산처럼 높아요. 지붕 처마 높이쯤 될 거요. 그 위에서 농사졌어요. 크기는 200평 이짝저짝 될 거요. 우리 생전에는 있던 것만 봤어요. 조상 때부터 만들어진 거요. 그런 것이 왜 있을까는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지금 생각하면, 논 칠라면 골라야 할 것 아뇨? 남는 흙을 모아 놓은 것이 뙤똥뱅이가 된 거지요, 이치가.”
최성렬의 구술처럼 ‘뙤똥배기’는 오래전부터 형성되어 있었다. 아직 농경지로 개간되지 않은 황무지가 있을 경우, 외지에서 누군가가 들어와 개간하고 정착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들판에 형성된 마을에 집성촌이 적은 이유와도 관련된다. 그런데 뙤똥배기 마루가 제법 평평하다 보니 그 위에서도 밭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애초 ‘뙤똥배기’는 무주공산이었을 것이다. 즉 버려진 땅에 개간지에서 나온 토사를 버렸다. 그런데 뙤똥배기 주변까지 개간되면서 아무개의 농지가 되니, 뙤똥배기도 아무개의 것이 되면서 토지주가 생겼다. 뙤똥배기가 묘지로도 쓰였다. 주변에 야산이 없는 마을은 멀리 떨어진 공동묘지로 가야 한다. 이럴 때 편의상 뙤똥배기에도 묘를 썼다. 석전리 원신정은 주로 정산마을 뒷산이 공동묘지여서 그곳에 매장했다고 한다.
“옛날에는 여기가 밭이 많았어요. 맨 밭이었어요. 그런디를 쳐서 논을 만든 거요. 그러니까 논이 다랭이논이 되는 거요. 그런 밭에다 묘를 썼어요. 그래서 예전에는 논 가운데 묘가 있었어요. 왜냐? 밭이었을 때 묘를 썼는데 밭을 논으로 치니까 묘가 논 가운데 생긴 거요. 밭이 없어서 묘 쓸 곳이 없는 사람들은 그런 디다(뙤똥배기에다) 묘를 썼어요. 그전에는 초학(初瘧) 들리면 거기로 데려가서 재주넘으면 낫는다고 애기들 데리고 뙤똥배기로 갔어요.”
다음은 최성렬 부인(84세, 1939년생)의 말이다.
“뙤똥배기라고, 오다가다 높은 디가 있었어요. 높아서 물 못 대면 밭으로 써먹었어요.”
3) 1987년 경지정리사업 당시 자부담 20%
이 당시 경지정리사업은 사업비의 20%를 자부담해야 했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신금리 마을사> 편에서 살펴본 바 있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경지정리사업의 사업비에 대한 보조율은 1971년부터 국고보조 50%, 지방비 30%(도비 15%, 군비 15%), 농민부담 20%로 규정되었으며, 종전 방식의 양곡 지원은 폐지되고 현금으로 보조하게 되었다. 이처럼 경지정리사업의 사업비에 대한 지원이 확대된 것은 1970년부터 미국의 무상원조가 거의 중단된 상태에서 경지정리사업이 농촌근대화 차원에서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그 후 1980년대에 경지정리사업에 대한 수요가 증대되었음에도 지방비 부담 때문에 수요를 충족할 수 없게 되자 1983년에 국고보조비와 지방비 부담 비율을 조정하였다. 농민부담 20%는 그대로 두고 국고보조를 기존의 50%에서 60%로 인상하고, 지방비는 30%에서 20%로 낮춘다.
1980년대 후반부터 소값 폭락으로 농가부채가 늘고 농산물 수입 자유화 조치로 농업소득 하락이 심화됨에 따라 20%의 농민부담이 걸림돌이 되었다. 이에 1986년 3월의 ‘농어촌종합대책’과 1987년 3월의 ‘농어가부채경감대책’ 등 농어촌대책의 일환으로 1988년에 지방비 부담 20%는 그대로 두고, 농민부담은 20%에서 10%로 낮춘다. 대신 국고보조를 60%에서 70%로 확대하였다.
1986년 9월 남미의 우루과이에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의 제8차 다자간 무역협상 회의가 시작되어 7년여에 걸친 협상 결과 1993년 말에 타결된다. 이에 따라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가 설립된다.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진행 과정에서 초미의 관심사는 농업 부문의 국제경쟁력 향상이었다. 우리나라 농업의 국제경쟁력은 너무나 취약하였다. 농업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기계화 영농의 실현, 생산비 절감, 고품질 농산물 생산 등이 필수적이었으며, 생산기반의 현대식 정비가 우선 과제였다. 1992년에는 경지정리사업에 대한 농민부담을 없애는 조치가 이루어져 1993년부터 시행되었다. 즉 경지정리사업비 보조율을 지방비는 20%는 그대로 두고 국고보조를 70%에서 80%로 올린다. 반면에 농민부담금 10%를 없애 경지정리사업에 대한 자부담이 철폐되기에 이른다.
“경지정리사업 할 때 주민들 자부담이 있었어요. 경지정리는 감보율이 있어요. 없던 농로 내고, 없던 수로 내고 하면 논이 줄어들 거 아녀요? 그게 감보율이요. 설계 낼 때 ‘감보율이 몇 프로다’, 미리 딱 나와요. 가령 내 논이 100평인데 경지정리하고 나니까 80%로 줄었어요. 근데 감보율이 20%라고 한다면, 내 논은 20% 딱 떨어졌잖아요? 그러면 없어진 20%를 내가 자부담 한 거요.”
그러니까 20% 자부담이라는 것은 현금으로 무조건 할당되는 것이 아니라, 본인 소유의 농지 감보율에 따라 연동된다. 내 논이 25%가 줄었다면 초과된 5%를 돈으로 환급받게 되고, 15%가 줄었다면 나머지 5%를 차액으로 납부해야 한다. 자부담은 이런 방식으로 감보율과 감보된 농지에 따라 차등 부과되었다. 1987년 당시 석전리는 도로 쪽은 평당 1만 원, 뒤쪽은 평당 8천 원씩 계산되었다고 한다. 석전리 경지정리사업이 끝나고 8년 후인 1993년부터 이 자부담이 완전히 철폐되었다.
5) ‘우산천’은 본래 지명, ‘제1도수로’는 일제강점기 만경강개수공사 사업명칭, ‘수리조합또랑’ 또는 ‘냇갈’은 현지 주민들의 관행적인 명칭이다.
6) 최성렬(삼례읍 석전리 원신정, 88세, 1935년생). 석전리에 대한 핵심제보자이다. 본인의 출생이 호적상 1933년생으로, 실제보다 두 살 더 위로 되어 있다고 한다. 그는 삼례 영신학교(현 삼례중앙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당시에도 8세 때 삼례국민학교를 입학하러 갔더니 호적상 10세다 보니 나이가 많다고 받아주지 않아서 할 수 없이 영신학교를 갔다고 한다. 영신학교는 나이 많이 먹은 학생들과 학비가 싸서 가난한 집 자녀들이 많이 다녔다고 한다. 그는 상급학교로 이리 공업중학교(5년제)에 입학하였다. 그러다가 6・25 전쟁이 발발했다. 그는 실제보다 두 살 더 먹었기 때문에 의용군이나 학도병 징집대상이 되었다. 징집을 피하려고 학교를 작파하였다고 한다. 그에게 시대적 불운이 겹쳐 일어났다.
김성식 박사(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 특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