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터

흉터

명사1 상처가 아물고 남은 자국

 

대여섯 살 무렵, 할아버지 댁에는 큰 개가 살았다. 곧게 솟은 꼬리마저 늠름했으니 덩치야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만큼 우직했다. 어린 꼬마의 눈에도 늠름함과 우직함은 경이롭게 다가왔고 직접 손으로 끌어봐야겠다는 욕망이 도사리고 있었다. 어른들이야 대여섯 살 사내아이에게 개를 직접 끌게 할 리 없었으므로 나는 때를 기다리고 있어야만 했다. 살아있는 먹이 향해 웅크린 사자처럼, 소리 지운 치타처럼.

 

집안 가득 모인 어른들이 제사상으로 우르르 몰려들 무렵, 소리 없이 현관으로 향했고 입 벌린 신발 아무거나 발을 쑤셔 넣었다. 그리고 물소처럼 얌전한 개의 목줄을 풀었다. 그리고는 의기양양 대문을 여는 순간, 개는 순식간에 자신의 숨겨둔 엔진을 가동했다. 어설픈 어린 맹수를 흉내 낸 꼬마쯤은 안중에도 없었다. 허나 아이도 사내인 법, 목줄을 움켜쥐고 팽팽한 줄다리기를 시작했다.

 

부지불식간, 움켜쥘 새도 없이 목줄과 함께 날았다. 늠름한 개의 반동에 마른 사내아이쯤이야. 거기에 더해 급히 신은 신발마저도 문제였다. 젊은 고모의 굽 높은 구두 아니었던가. 개는 놓쳤고 대문 앞 계단에서 구른 나는 벌떡 일어섰다. 자유를 만끽하며 이리저리 튀어 오르는 개를 노려보는 찰나, 손등으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기어이 대문을 넘어 마당을 넘어 제사상까지 악다구니 울음이 퍼졌다.

 

며칠 전 여행에서 돌아와 길게 자란 수염을 면도하다 깊게 패인 턱의 흉터를 보았다. 턱을 높이 들어야만 보이는 깊은 흉. 순간 잊었던 대여섯 살의 생이 고스란히 욕실 거울에 펼쳐지는 것이 아닌가. 악다구니 울음에 집안 어른들은 비상이었고 애먼 개와 엄마와 고모에게 쏟아지는 핀잔들. 고모의 하이힐은 빨간색이었던가?

 

상처는 낫게 되어있다. 아니 나을 수밖에 없다. 시간은 상처와 비례이지 않던가. 상처는 흉터를 만들고 그 흉터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옅어질 뿐. 오래된 흉터는 기억을 소환하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턱의 흉을 오랜만에 발견하고 손길로 흉을 만지는 순간 어릴 적 기억이 오버랩되지 않았던가. 나는 대여섯의 소년으로 돌아갔고 낯익으면서도 생경한 어린 나를 만났다. 하지만 그 기억이 사실이 아닌 왜곡과 변질이라면.

 

개는 사실이고 개의 늠름함과 덩치는 꾸며진 기억일지도 모른다. 굽 높은 신발은 사실이고 뽀족 구두인 하이힐은 사실이 아닐지도. 그럼 제삿날은 사실일까?

 

흉터는 기억을 소환한다. 하지만 소환된 기억은 내 몸에 맞춘 기억이다. 약간의 변형, 편한 옷과 세련된 옷을 선호하듯 기억도 편함과 조금더 화려한 치장을 하는 법.

며칠 전 배편으로 여행지를 가는 와중 옆자리 중년의 사내들이 서로의 기억을 맞추며 옥신각신 중이었다. 내 기억이 맞다, 아니다 내가 맞다. 두 사내의 옷차림은 화사했고 취기에 들떠 농 아닌 농으로 서로의 기억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어쩌면 두 사내도, 당신도 그리고 나도, 서로의 몸에 맞게 기억을 변형시키고 있을지도. 흉터는 흉이 아니다.

 

 

김성철 시인. 시집으로 『달이 기우는 비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