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와리 후와마을
완주군 삼례읍 구와리는 오래된 와리라는 뜻이다. 지명이 와리인 경우는 보통 마을에 기와를 굽는 곳이 있었다. 그런데 구와리에서는 기와를 굽던 가마에 대한 기억이 있는 주민을 만날 수 없었다. 오래전 일이라 전승이 안 된 것인지 기와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동네에 기와집이 많아 와리라고 불렸을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구와리는 집성촌으로 후와에는 전주이씨가 전와와 유리에는 전주류씨가 살고 있으며, 사람은 ‘이씨’가 재산은 ‘류씨’가 낫다는 말이 있다.
후와는 뒤쪽에 있는 와리라는 뜻으로 수로가 마을을 지난다. 만경강 개수공사 전에는 뒷내라고 부르던 개울이다. 오래전 구와리와 하리는 만경강 가운데 있던 섬이었다. 앞에 흐르는 만경강을 앞내, 뒤에 흐르는 강을 뒷내라고 불렀다. 비가 많이 오면 홍수로 늘 피해를 보던 지역이었지만, 만경강의 직강화 공사로 강이 나뉘면서 뒷내는 둔내라고 불리는 현재의 인공수로가 되었다. 토관을 넣지 않은 마을 쪽 냇가는 왜가리를 비롯한 철새들이 먹이를 찾아 날아오고 있어 근처 학교 아이들에게는 좋은 생태교육장이 될 수 있다.
<후와마을 괴정>
후와마을 중앙에는 오래된 낡은 정자가 있다. 괴정 이창신이 전주 이씨 집안과 마을의 아이들을 교육하던 서당이다. 이창신은 유학자였고 동생 이현신은 동학교도였다고 전해진다. 유학자 이창신은 우삼, 우복 형제를 두었고, 동학교도 이현신 선생은 종갑, 우성 형제를 두었다. 한 집안에 정반대의 이념을 가진 두 형제가 있음이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종갑, 우성 형제는 괴정 이창신에게 만갑, 판용, 순교 등 5촌 조카들과 함께 교육을 받았다. 유학자 이창신의 영향인지 혹은 동학교도 이현신의 영향인지는 모르지만, 이들은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이루어 다 같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1947년 7월 6일 자 국제일보에 “와리는 농사에 종사하는 근로 인민들이 사는 마을이다. 왜정의 폭압 아래서 징용을 기피 하였고 공출에 항거하여온 마을로 유명하다.”라는 기사가 있어 와리 사람들이 일제강점기를 지나는 동안 독립운동을 치열하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은 크게 무장투쟁, 실력양성, 소작쟁의로 표출되었다.
삼례 소작쟁의와 이우성
<이종갑>
곡창지대의 쌀에 눈독을 들인 일본인들은 호남평야에 모여들었고 춘포들, 삼례들, 만경들은 일인들의 차지가 되었다. 일인들은 생산한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교통의 요지 삼례에 기차역을 만들었다. 삼례역을 중심으로 노동자와 농민들의 고단한 삶이 이어졌다. 민중의 고단한 삶은 지식인들을 각성시켰고 노우회와 농우회가 만들어지고 활동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 지주들은 소작권을 무기로 소작인을 착취하였다. 한국인 마름들의 횡포는 말할 수도 없었다. 이 횡포에 대항하여 소작쟁의가 일어났다. 터무니없는 소작료 인상에 대한 항거였다. 일 년 내내 농사를 지어도 내 입은 고사하고 자식들 입에 쌀 한 톨 넣어 줄 수 없는 비참한 현실에 대한 항거였다. 중외일보 1930년 3월 21일 자에서 삼례 소작쟁의와 관련 다음과 같은 기사를 내보냈다.
1930년 3월 초에 농장의 사음 강춘식과 육진홍은 마지기 당 두 말씩의 소작료인상 계약서의 서명을 강요하였다. 계속되는 자연재해를 입은 소작인들이 진정서에 서명하여 이리 본점에 제출하자 농장의 일본인 주임이 비난하면서 수백 명의 소작권을 박탈하였다. 며칠 후 삼례 주재소는 삼례농우회 간부 이종갑(이우섭), 이우성(이장군), 이판용(이언교), 수계리농회원 한사현, 한병섭을 조사하였다. 그리고 4월 14일 경찰이 와리에 출동하여 이용구, 한병태, 한병석을 소작계약서를 작성하러 출장 나온 농장직원을 폭행한 혐의로 검거했다. 다음날 3인을 석방하고 현장에서 이종갑, 이판용, 이만갑(이만교)을 소작쟁의를 선동한 혐의로 심문하였다. 4월 16일에 우곤농장과 화성농장은 경찰을 대동하고 구와리에서 이용구, 이형길, 한병태, 한병석, 한사현, 임곱불 등을 검거하여 구속하였다.
삼례 소작쟁의 기간 중 이만갑, 이판용은 소작관에게 진정서 제출하였고 이순교는 소작인대표로 토지주와 협상하였다. 처음 소작쟁의는 단순히 소작료를 낮추기 위한 생존 투쟁이었다. 그러나 소작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독립이 있어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농민투쟁이 정치투쟁으로 진화하게 되었다. 1930년대 소작쟁의는 조선인 지주에 대한 것은 많지 않고 1천 정보 이상의 일본인 대지주를 상대로 한 항일투쟁이었다. 결국 소작쟁의는 자연스럽게 독립운동으로 연결되었다. 삼례 구와리의 소작쟁의는 농우회와 농계가 중심이 되어 본격적 농민조합으로 가는 과정을 보여 준다는 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다.
<이우성>
소작쟁의를 주도한 이우성은 전주도립사범학교(현 전주교대) 출신으로 장수와 임피에서 교원으로 일하였다. 아마 임피에 있는 동안 옥구의 소작쟁의를 경험한 것이 삼례 소작쟁의를 주도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짐작한다. 안정적인 교원의 길을 버리고 농민운동에 헌신한 이유는 고향에서 자행되는 일제의 수탈을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이우성은 농민들이 처한 현실에 대해 깊이 동정 하였고, 농민이 대우받는 나라를 꿈꾸며 반일과 민족주의자의 길을 흔들림 없이 걸었다.
이러한 선생의 행적은 조선소작인상조회 전주지회 부회장을 맡았던 안용진이 변절하여 1931년부터 1941년까지 삼례 면장을 지냈던 것과 대조를 이룬다. 해방 이후 우리는 친일 부역자들을 청산하지 못하였다. 덕분에 삼례에서 이뤄졌던 수많은 항일에 관여했던 유명• 무명의 인사들을 제대로 예우하지 못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그들의 충의와 절개를 기억해야만 한다. 이것이 삼례의 상처를 치유하는 첫걸음이다. 반드시 삼례에서 이뤄졌던 항일운동에 대한 조명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종갑. 이우성. 이만갑, 이판용, 이순교, 김불. 김춘배. 한사현, 한병섭, 이용구, 한병태, 한병석, 이형길, 임곱불, 김형민. 박한영 등은 삼례 출신 독립운동가이다. 이들과 함께 꼭 기억해야 할 동학농민혁명군….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그들을 잊을 수는 없다. 그들은 삼례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징용을 기피하고 공출을 거부하며 줄기찬 소작쟁의로 일제에 항거한 구와리 사람들은 해방정국에서는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농민조합, 청년회, 부녀회, 토지분과위원회 등을 두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문도 익히고 분쟁의 중재에 능숙한 40대 중반의 이우성과 이평교가 토지분과위원회를 맡았다. 해방정국에서 구와리는 진보적인 지식인들은 “토지혁명으로 민족통일과 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한다”라는 주장을 하였다. 덕분에 와리는 한국의 ‘○○코바’라는 별칭이 생겼고 우익테러의 목표물이 되었다.
1947년 5월 30일 완주군 삼례지구 독촉위원장 안용진과 대원 3명이 성인교육을 시키려고 와리에 갔다가 당시 수배 중이던 와리 민청위원장 김기두를 발견하고 체포하였다. 이들이 경찰이 아닌 것을 알게 된 와리 주민 10여 명은 이들을 구타하여 김기두를 탈환하였다. 그러자 삼례 독촉원 50여 명이 오후 7시경 몽둥이와 죽창, 일본군도를 가지고 와리를 습격하여 30여 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심지어 임신부를 구타하고 60살 노인을 논 속에 처박고 짓밟았다. 그러나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경찰은 우익의 도움을 받아 주민 100여 명을 체포하였다. 3일 뒤에야 정읍 경찰서의 명령으로 독촉원 김일환과 10명을 체포했으나 전부 석방되었다.
이 사건을 취재한 기자는 집을 부수고, 사람을 때리고, 불을 질러도 도망갈 우려가 없으면 체포하지 않는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며 분통을 터뜨린다. 주민은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누구를 믿어야 하냐며 절규한다. 테러로 인해 와리 주민은 낮과 밤을 공포에 떨어야 했으며 농사를 지어야 할 청년들은 지하로 숨었다. 일본사람이 아닌 조선사람의 손에 파괴되는 와리를 보며 기자의 마음은 한없이 쓰라렸다. “테러로 상처받은 와리 주민의 심정과 원한은 인제 없어질 것이며 언제 회복할 것인가?”라고 쓰고 있다. 마을에서 만난 80대 어르신은 어릴 적 읍내에 나가면 단지 와리에 산다는 이유로 두들겨 맞았다고 했다. 70여 년이 흘렀어도 상처는 아직 진행 중이다.
문화치유
<괴정 앞 불탄 느티나무>
전주이씨 입향조인 이도행은 구와리에 자리를 잡은 뒤 손수 괴목(槐木)을 심었다고 전한다. 괴목(槐木) 느티나무일 수도 회화나무일 수도 있다. ‘괴(槐)’자는 ‘회화나무(홰나무) 괴’이기도 하지만, ‘느티나무 괴’로 쓰거나 읽기도 한다. 괴(槐)는 나무 목(木)자와 귀신 귀(鬼)자가 합쳐진 글자로 ‘나무귀신’이거나 ‘귀신이 붙은 나무’로 해석할 수 있다. 느티나무는 마을 입구에 정자나무로 많이 심었다. 어렸을 때는 볼품이 없지만 나이가 들수록 우아한 자태가 드러난다. 늦게 티가 나서 느티나무이다. 옛날 시골에서는 봄에 느티나무의 잎이 나오는 모습을 보고 그해 농사가 풍년인지 흉년인지를 점쳤다. 목재는 불상, 기둥, 가구, 악기 등을 만들었고 열매를 먹으면 눈이 맑아지고 흰머리가 검게 된다는 기록도 있다. 1000년 이상 산 나무 중에 느티나무가 가장 많다. 오래 살아서 귀신 나무귀신인지도 모르겠다.
이우성의 할아버지 이영환(李永煥)은 명신(命新), 창신(昌新), 현신(顯新) 세 아들을 두었는데, 구와리에 괴정(槐亭)을 세우고 호를 각각 괴헌(槐軒), 괴정(槐亭), 괴중(槐中)이라 하였다. 괴정(槐亭) 앞에 불에 탄 흔적이 있는 느티나무가 있다. 보일러의 연통과 느티나무가 너무 가까이 있어서 불이 났었다. 이 느티나무 아래 있는 집이 삼례 소작쟁의를 주도한 이우성이 살았던 집이다. 지금은 이우성의 맏며느리가 살고 있다. 느티나무가 보았던 와리 사람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느티나무가 들려주는 마을의 이야기,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본다.
삼례는 다양한 골목답사 코스를 만들 수 있는 곳이다. 문화치유가 문화를 통하여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는 것이라면 골목여행 혹은 골목답사는 문화치유의 한 부분이다. 삼남대로가 지났던 옛길이나 하리 용전마을 하리교회에서 시작해서 새터, 전와마을, 유리, 신천습지, 조사마을을 거쳐 다시 하리교회에서 마치는 하리골목답사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골목답사를 통해 나무 이야기도 듣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사라져 가는 골목에는 사람 냄새가 풀풀 나는 추억이 살아 있다. 어른에게는 추억을 회상하게 하고, 아이에게는 어른들의 삶을 배우는 현장이 될 수 있다. 어른, 아이에게 모두 유익한 골목 여행이 많아지면 좋겠다. 골목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지친 사람들이 위로받고 치유되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