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전마을 버드나무가 들려주는 하리 이야기

옳은 일에 앞장섰던 하리사람들

버드나무 노거수

 

삼례읍 하리 용전마을에는 버드나무 노거수가 있다. 노거수란 어른 가슴높이의 나무 둘레가 3m 이상이고 수령이 200년 이상인 오래된 커다란 나무를 가리킨다. 원래 버드나무가 있는 땅은 사유지인데 땅 주인이 버드나무는 마을 공동의 것이라며 버드나무가 있는 땅을 남겨 놓고 울타리를 둘렀다. 이래서 아직 우리 사회는 살만한 곳이다. 우리나라의 버드나무는 주로 왕버들, 능수버들, 수양버들이다.

 

버드나무 껍질에는 아스피린을 만드는 살리실산이라는 화학물질이 들어 있다. 아스피린으로 유명한 제약회사 바이엘에서 세계 여러 나라의 버드나무에서 살리실산을 추출하여 실험해 본 결과 우리나라의 버드나무에서 추출된 살리실산의 효능이 가장 좋았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이순신 장군이 무과 시험 중 말에서 떨어졌을 때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다리를 묶었고, 그 옛날 진통제가 없던 시절 아이를 낳을 때 산모는 입에 버드나무 가지를 물었다고 한다.

 

식사 후에 우리는 양치질을 한다. 양치질의 ‘양치(養齒)’는 버드나무 가지를 뜻하는 ‘양지(楊枝)’에서 왔다. 가지 지(枝) 자가 발음이 비슷한 이 치(齒)자로 대치되며 양치질이 된 것이다. 오래된 옛날의 칫솔은 버드나무 등으로 만든 이쑤시개 형태였다고 한다. 오래전 아랍에서 살 때 전통시장에 가면 나뭇가지를 한 묶음씩 파는 장사치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 나뭇가지를 사서 하루종일 씹고 다녔는데 칫솔의 원형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우리 조상들은 버드나무 가지에 소독 효과와 진통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았던 모양이다.

 

임광호 전도사 순교비

버드나무 노거수 앞에는 커다란 비석이 하나 서 있는데 임광호 전도사 순교비이다. 임광호 전도사는 황해도 신천 출신이다. 임광호 전도사는 만주에서 신학을 공부하였고 해방이 되면서 공산당의 박해를 피해 자유로운 신앙생활이 가능한 남한으로 내려와 삼례 와리교회에 부임하였다.

 

임광호 전도사가 외리에서 생활하던 해방 직후의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가 활동하던 당시엔 신탁통치 반대를 내건 우익단체의 테러가 격심하여 농민들이 농사조차 지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당시 와리는 400여 주민이 대개 자소작을 하는 중농 이하 빈농으로 일제강점기 내내 줄기차게 소작쟁의를 하는 등 좌익계열이었다. 좌익과 결합한 농민운동은 집중적인 백색테러를 당하였다. 와리를 공격한 우익 백색 테러단은 사상전향서 작성, 독립촉성회 가입, 기부금을 강요하고 이에 응하지 않으면 집중적으로 구타하거나 소작권을 박탈하였다.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계급장 없는 군복을 입고 이북 사투리를 쓰는 청년들이 무장한 경찰과 함께 나타나 몽둥이로 집집마다 다니며 기물을 부수었다고 한다. 추운 겨울인데도 방문을 부쉈고 한해를 지낼 간장독, 된장독까지 박살을 냈다는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그들에게 얻어맞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하는데, 테러의 이유는 전주 시위에 와리 사람들이 늘 앞장섰기 때문이었다.

 

공산당으로 몰려 극심한 백색테러에 시달리고 있는데 이북 사투리를 쓰는 교회 전도사가 주민들 눈에는 예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에 와리교회는 장로교이고 임광호 전도사는 성결교 목회자이다. 교리의 차이도 갈등의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임광호 전도사는 와리를 떠나 하리에 교회를 개척하였고, 한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 순교하였다. 극한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가져온 비극이다.

 

 

김불(金佛)

현재 하리는 삼례읍이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초포면이었다. 소양천 상류인 초포면에는 상리, 중리, 하리가 있었는데 행정개편으로 상리와 중리는 전주시에 편입되고 하리는 삼례읍이 되었다. 그래서 삼례 읍내보다 만경강 상류 지역이면서 하리라고 불리는 이유이다. 김불은 초포면 하리 출신으로 삼례에 살면서 신간회 전주지회 간사로 활동하였다. 김불에 관한 기록은 1929년 5월 3일 자 동아일보에서 찾을 수 있다. 구와리 이만갑은 하리 김불과 함께 전주북부농민조합을 설립하려고 각처로 다니며 농민들을 설득하고 있었다. 이를 눈치챈 경찰이 농민조합에 두 가지 불온 조건이 있다며 집회를 금지했지만 두 가지 불온 조건이 무엇인지는 비밀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만갑은 구와리 소작쟁의를 주도했던 인물이었음을 고려하면 김불이 구와리 소작쟁의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김불의 이야기는 1930년 1월 20일 자 동아일보에서 또 발견된다. 김불은 하리에 무산전동학원(無産全童學院)을 세웠다. 당시 하리에는 오천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아동 교육기관이 없었다. 유산계급 자녀는 삼례나 동산 등지의 학교로 통학하였지만, 무산계급의 자녀는 학교에 입학하지 못하였다. 이에 김불은 동네 유지 모모 씨들과 취장단 조직하여 무산전동학원을 설립하고 20여 명의 아동에게 무보수로 조선어, 산술 등을 교수하였다는 내용이다. 1930년 4월에는 삼례 우곤농장 소작쟁의 선동 혐의로 붙잡혔다가 석방되었다는 기사도 있다.

 

나중에 그는 하봉무산야학을 설립하고 교사로 근무했으며 신금리에서는 1929년 10월 실업단 산하에 아동 야학을 개설하였다. 교사는 신금리 진흥회장 임광환(任光煥)을 포함하여 이규철(李圭喆), 임남조(林南祚) 등이었고 재학생은 30여 명이었다. 그가 설립한 야학은 모두 무산아동을 위해 설립된 것으로 보아 하리의 청년들이 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소년들을 동정하여 연 듯하다. 일본 경찰은 통제할 수 없는 야학의 특수성으로 인해 감시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청년들은 성인이나 아동을 대상으로 꾸준하게 야학을 열었다. 야학은 주민들의 의식개혁에 일익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삼례 지역 청년들의 노고가 재평가되어야 한다.

 

야학의 정신은 한국 전쟁 후에도 이어져 삼례의 지식인들은 1960년 석전고등공민학교를 세운다. 석전고등공민학교 설립자 김응혁은 삼례 태평리 출신으로 초포고등공민학교 설립자 이범술로부터 학교를 이전하여 하리에 학교를 세웠다. 삼례의 지식인 박용철(전북대), 송호술(서울교대), 공석종(전북대), 정대봉(석전출신)이 교사진으로 참여하였으며 이학이 교감을 맡았다. 학생 수는 100명이 넘었다. 이후 석전리 공주사범 출신 이인근이 논 300평을 희사하여 석전리에 교실 3칸이 있는 학교를 지었고 교장 김응혁, 교감 이학 등은 밤 11시까지 성심을 다해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석전 박한영(朴漢永)

 

박한영은 석전정호(石顚鼎鎬, 1870~1948) 스님의 속명이다. 석전 박한영 스님은 삼례읍 하리 조사마을 출신으로 삼일운동 이후 조직된 한성임시정부에 전라북도 대표로 참여하였다. 환응(幻應)스님에게 사교를, 경운(擎雲)스님에게 대교를 이수하고, 설유(雪乳)스님의 법을 이었다. 만해(卍海)· 금파(琴巴) 스님 등과 불교개혁에 나섰고 만해· 성월(惺月)· 진응(震應)· 금봉(錦峯) 스님과 친일불교에 맞서 조선불교 정체성을 수호하기 위해 임제종(臨濟宗)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고등불교강숙 숙사(1914), 중앙학림 강사와 교장(1915~1922), 중앙불전 교장(1930~1938)으로 후학을 양성하고 조선불교 교정(敎正)을 지냈다. 이광수, 최남선, 정인보, 양건식, 이병기, 권덕규 등 당대의 최고의 국학자와 문인들과 교유하였으며 1930년대 중앙불전과 개운사 강원에서 조종현, 서정주, 신석정, 김어수, 김달진, 조지훈 등의 시인을 배출했다. 석전 스님은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을 찾는 데 일조하였다. 최근 석전스님 기념관이 삼례가 아닌 고창 선운사에 건립되었다. 삼례사람들의 관심이 아쉬운 부분이다.

 

삼례정신

삼례를 관통하는 삼례의 정신은 무엇일까? 특히 구와리와 하리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정신은 무엇일까? 구 삼례중학교 교정에 서 있는 비석에는 ‘옳은 일에 앞장서라’라고 적혀 있다. 옳은 일을 외면하지 않고 투쟁하였던 정의, 가난한 자를 외면하지 않았던 박애, 편협한 사고에 갇히지 않은 자유, 사회적 책무를 외면하지 않은 지식인들의 책임감 이것이 삼례 정신이다. 삼례를 관통하고 있는 이 위대한 정신이 지금을 사는 우리를 비추는 횃불이며 묵묵히 하리 사람들의 치열한 삶을 지켜본 나무가 들려주는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