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와마을 팽나무가 들려주는 효자와 열녀이야기

새터 효열비각

 

전와마을에는 거대한 팽나무 두 그루가 있었지만 한 그루는 2019년 여름 바람이 많이 불던 어느 날 쓰러져 버렸고 현재는 한 그루만 남아 있다. 대나무로 만든 딱총에 팽나무의 열매를 넣고 쏘면 ‘팽’ 소리가 난다고 해서 팽나무라고 부른다. 팽나무는 주로 서낭당의 역할을 하였다. 서낭은 마을 지킴이로 경제적으로 어렵거나 사당을 짓기 어려운 입지 조건일 때 마을 입구에 있는 커다란 나무를 서낭으로 삼아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셨다. 어쩌면 가난했던 전와마을도 사당을 지을 형편이 안 되어 마을 입구에 있는 이 커다란 팽나무를 서낭으로 모셨을지도 모른다. 팽나무가 있는 전와마은 앞에 있는 와리라는 뜻이고, 새터라고도 부르는데 새롭게 생긴 마을이라는 뜻이다. 2019년 태풍으로 쓰러진 팽나무 대신 어린 팽나무를 심어 놓았다.

 

노거수는 100년 이상 된 오래된 나무로 땅에서 약 1.2m 높이에 있는 나무의 둘레가 3m 이상인 거목으로 노수(老樹)· 노목(老木)· 고목(古木)이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 주변의 노거수들은 마을의 역사와 전설, 고사를 담고 있으며 그들의 연륜으로 인해 신령한 존재였다. 주민과 함께 살아온 오래된 거목은 마을의 정신적인 지주였고, 제사를 지내는 터이고, 동네 사람들의 쉼터였다. 노거수는 둥구나무, 당산나무, 혹은 정자나무로 사람들과 함께 살아왔다. 사람의 삶은 겨우 100년이기에 다 돌아갔지만 천 년을 살아남은 거목도 있다. 그러나 새마을 운동으로 대변되는 근대화를 겪으며 사라져 간 노거수가 하나, 둘이 아니었다.

 

마을에 있는 오래된 거목은 마을의 전설과 설화, 고유 신앙 등을 가지고 있기에 나무와 마을 이야기는 문화사적인 가치가 높다. 요즘은 오래된 거목에 대한 가치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며 노거수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수령 100년 이상의 노거수 중에서 고사나 전설이 있는 나무 또는 특별히 보호가 필요하거나 증식 가치가 있는 나무를 보호수로 지정하고 있다. 보호수가 되면 산림보호법에 의거 산림청의 체계적인 관리를 받는다. 보호수의 지정과 해제는 도지사가 하고 관리는 시장· 군수가 한다.

 

새터 효열비

 

 

전와마을에는 3개의 정려각에 8개의 전주유씨 가문의 정려가 있다. 팽나무 노거수 아래 있는 1칸짜리 정려각에는 1891년에 세워진 유기현, 유기섭의 정려가 있다. 유기현과 유기섭의 할아버지는 형제이다. 유기현[1814~1881] 내외는 효성이 깊어 부모님 병환에 수발을 다 했기에 정려를 받았다. 유기섭[1797~1868]은 창백(蒼柏) 박종열(朴宗說)에게서 배워 학문이 높았으며 봉동 구미리 구호서원에 배향되었다. 유기섭은 부모의 상을 당해 여묘살이를 하였고, 그의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고종 때 정려를 받았다.

 

새로 심은 어린 팽나무 곁에 있는 비각에는 1932년에 세워진 2개의 비석이 있는데 하나는 효자비이고 하나는 열녀비이다. 효자비의 주인공은 유영철로 유기호와 그의 두 번째 부인인 평양조씨의 양자이다. 유영철과 그의 아내 전주이씨는 지극한 효자, 효부로 어머니가 병이 나면 곁을 떠나지 않았고, 어머니가 바라는 일을 기쁨으로 행하였으며 조금도 언짢아하지 않았다. 이들 부부는 궁색함을 벗으려고 열심히 일했지만, 문병 오는 손님은 명절날처럼 음식을 대접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유영철 부부를 하늘의 뜻으로 태어난 대효(大孝)라 부르며 나라에 효자각을 세우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유영철 효자비 옆에는 며느리 남양홍씨의 열녀비가 있다. 남양홍씨는 효자 유영철의 아들 유발에게 시집을 왔지만, 남편이 허약하여 병시중을 들어야 했다. 온갖 정성을 들여 병간호하였으나 유발은 열아홉 살에 세상을 떠났다. 스물한 살에 청상과부가 된 남양홍씨는 남편을 따라 죽을까도 생각하였지만 자신보다 못한 사람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을 바꾸고는 정말 열심히 일하여 집안 살림이 늘어가는 보람으로 살았다. 아들이 없어 홍근을 양자로 들였고 83세까지 장수하였다. 홍씨 부인이 세상을 뜨자 나라에 추천하여 각을 짓고 비를 세웠다.

 

그 옆에는 1892년에 세워진 3칸짜리 정려각이 있다. 이곳에는 유지현, 유기창, 유한철, 풍양조씨의 정려가 있다. 유지현은 효행이 뛰어나 1881년(고종 18) 9월에 정려를 받았다. 유기창(柳基昌)[1807~1886]은 효자 유지현(柳之賢)의 아들이다. 유한철(柳漢喆)[1829~1887]의 할아버지는 효자 유지현(柳之賢), 아버지는 효자 유기창(柳基昌)이다. 특이하게도 유지현, 유기창, 유한철 3대에 걸쳐 효자 정려를 받았다.

 

평양조씨는 효자 유영철의 양모이다. 풍양조씨는 남편이 병을 얻자 자신의 넓적다리를 구워 먹였는데 이 덕분인지 남편은 10년을 건강하게 살았다. 그러나 남편의 병이 재발하여 더욱 나빠지자 부인은 자신의 손가락을 절단하여 피를 마시게 하는 등 지극정성으로 남편 병구완을 하여 정려를 받았다. 재미있는 사실은 풍양조씨의 남편 유기호의 아버지 유지룡과 효자 유지현은 형제이다. 유지룡 가계에서 효자 한 명과 열녀 두 명이 나왔으며, 내리 3대가 효자 정려를 받았다. 또한 열녀 풍양조씨의 남편 유기호(1825~1841), 효자 유기창(1807~1886), 효자 유기현(1814~1881), 효자 유기섭(1797~1868)은 한 항렬일 것으로 추정된다. 한 집안에서 같은 시기를 산 네 사람이 정려를 받았으니 9시 뉴스에 대서특필될 일이다.

 

 

옛날에는 효자비나 열녀비를 개인적으로 세울 수 없었다. 반드시 나라의 허가를 받아야만 하였다. 다른 말로 하면 조선의 정절 문화는 나라에서 관리하였다는 뜻이다. 임진왜란를 기준으로 조선을 전기와 후기를 나눈다. 조선 전기에 열녀는 272명이었지만 조선 후기에는 845명이다. 조선 전기에는 단순히 개가를 거절하거나 수절만 하여도 열녀로 선정될 수 있었지만 조선 후기에는 특이한 이야기가 있어야만 선정될 수 있었다. 그래서 효자의 이야기에는 병이 난 부모님을 위해 엄동설한에 여름 과일을 찾아 나섰고 열녀 이야기에는 넓적다리 살을 구워 먹이거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받아 먹인다는 이야기들이 단골로 등장하게 된다.

 

이렇게 조선 후기에 열녀의 수가 증가하는 것은 성리학의 보급으로 백성들이 교화된 것도 있지만 중앙 정부의 충성 강요가 여성에겐 정절 강요로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열녀 정려를 받으면 명예는 물론 세금감면과 군역의 면제라는 실질적인 혜택이 주어졌기에 여성들에게 수절을 강요하거나 자살하라는 압박이 가해졌던 것도 사실이다. 심하면 자살을 거부한 청상과부 며느리를 가문에서 살해하는 일도 발생하였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어사 박문수 이야기의 배경이다. 반면에 개가한 과부의 자식은 아무리 똑똑해도 관직에 나갈 수 없었다. 조선에서 유일한 직장은 공무원인데 관직에 나갈 수 없다는 것은 평생 백수로 살아야 한다는 말과 같았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구조적으로 여성의 개가를 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