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 시절의 별을 찾아 삼례에 왔어요”

구와리 유별난딸기 농장의 청년 농부들

오전에 찾아가겠다는 약속만 하고 시간을 정하지 않았다. 명함에 적힌 구와리 농장을 찾아가는 길은 좁고 구불구불했다. 10시 반이 넘어갈 무렵, 유별난딸기 농장에서 전화가 왔다. “어디세요? 우리 작업 거의 끝났는데요.” 딸기하우스에서는 새벽 3시부터 일한다는 것을 기자는 몰랐다. 농부들에게 ‘오전’이란 훨씬 더 이른 시각을 말했다.

다행히 트럭에 실은 딸기를 배달하기 직전에 잠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이야기 나눌 시간이 있었다.

 

▲ 왼쪽부터 박성호, 이광성, 홍승우 농부

 

 

 

▲ 수확하는 모습.

 

▲ 유별난딸기 농장에서 쓰는 난좌 포장 방식

 

하우스 입구에서 안을 들여다보니 이랑이 꽤 길었다. 푸른 잎에 붉은 열매가 알알이 맺힌 딸기 이랑이 반대편 입구까지 뻗으며 소실점을 이루고 있었다. 기자는 평행한 이랑이 저 끝에서 만나는 모습이 각자 아무 인연 없던 세 명의 청년이 만나 함께 일하고 있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하우스는 모두 세 군데에 있다고 했다. 세 분이 투자를 많이 했냐는 질문에 다들 웃으며 아직은 임대를 받아서 한다고 대답했다.

기자는 세 농부의 인연이 어떻게 맺어졌는지 궁금했다.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인 세 명이 겉보기에는 최소 십년지기 친구들 같았다. “저희는 사전에는 서로 몰랐어요. 완주 귀농인의집이라고 있는데, 각자 어쩌다가 완주에 꽂혀서 귀농인의집에 왔다가 만난 거지요. 거기서 뜻이 맞았어요. 원래 딸기를 할 생각도 없었어요. 처음 와서 농사 경험이 없으니, 농사는 배워봐야 되지 않겠냐 해서 한 것이 망고참외였어요. 초보자가 남들 다 하는 거 하면 경쟁력이 없다 싶어서, 새로운 품종을 한 것인데, 쫄딱 망했죠. 그때 느낀 게 인프라가 구축된 걸 해야겠구나. 남들이 다 하는 이유가 있구나. 그래서 딸기를 처음 시작하게 됐고, 지금은 3년차예요.”

흔한 상식으로는 귀농준비를 철저히 하지 않으면 실패한다고 하는데, 이 분들은 작목도 정하지 않고 무작정 내려와서 처음 만난 사람들과 같이 동업까지 한 것이다.

“귀농한 이유요? 우리 중에 아이가 있는 집도 있고, 없는 집도 있지만 아이를 도시에서 키우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있었어요. 그리고 도시에서 생활하다보면 질리는 것 있잖아요.”

딸기 수입은 어떻냐는 질문에 표정이 진지해졌다.

“딸기가 투자비가 많이 들지만 매출이 많이 나오는 작목이고, 귀농하는 사람들이 많이 선택하는 품종이더라고요. 그래서 저희는 생산 위주로 가고 있고, 처음부터 인터넷을 통한 직거래를 많이 했어요. 직거래는 마진이 거의 두 배인데, 매년 비중이 늘어나고 있어요. 차라리 첫 해부터 망했으면 안 했을 텐데, 계속 될 것 같아서 관두지는 못하고 올해는 세 번째 수확이에요. 수확량이 더 늘어야 하지만, 매년 좋아지고는 있어요.”

전직들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했다. 작업복만 갈아입으면 전혀 농부 같아 보이지 않는, 해사한 얼굴의 세 청년들은 도시에서 무슨 일을 하며 살았을까?

“저(박성호)는 건축 실내 설계 디자인 파트였고요, 의류매장 관리자(박성호), 온라인 결재(홍승우) 같이 농사랑 전혀 관계없는 직업이었어요.”

그제서야 각자의 얼굴과 직업이 어울려 보였다. 아직은 세 명의 얼굴에서 농부의 얼굴보다는 도시인의 얼굴이 더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처음에 할 질문을 마지막에 했다. 왜 ‘유별난딸기’냐고. 이들이 귀농해서 서로 만나 지금까지 온 게 유별난 인연이라서 이름을 그렇게 지었겠거니 짐작했다.

“유년시절의 별을 기억하는 나. 그래서 유, 별, 난입니다. 저희가 생긴 제 좀 감성적으로생겼잖아요? 하하하.”

얼굴이 둥그스름한 박성호 씨가 그렇게 대답해서인지, 다들 많이 웃었다. 세 명은 도시에 살다가 어느 날 문득 유년 시절에 보았던 별을 기억해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별이 있는 곳을 찾아 완주 삼례까지 내려온 것이다. 여전히 별에 가 닿지는 못했지만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행복해 보였다.

자리를 털고 세 농부는 트럭에 탔다. 순간 왁자한 웃음 소리가 터져 나오며 트럭에 힘찬 시동이 걸렸다.

변두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