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겨울은 따뜻했다. 그녀와 나는 서로를 탐닉했고 우리는 서로가 세상의 모든 것이었다. 오직 그녀의 숨소리에 온 신경을 쏟아부었다. 나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살았다. 그땐 그랬다. 그러나 그쪽 집에서는 무엇 하나 빠질 것 없는 딸이 직장도 없는 가난한 놈과 붙어 다니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만나면서도 선을 보아야 했다. 새봄이 되면서 추위가 몰려왔다. 그녀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 나는 그녀 집 주변을 배회하면서 그녀 얼굴 한 번 보기를 소망했다. 꿈일 뿐이었다. 나는 좌절했다. 겨우 취직을 해서 적응하기에 바빠야 할 신참은 날마다 술 냄새를 풍기며 출근했다.
그대 보내고 멀리 가을 새와 작별하듯 / 그대 떠나보내고 돌아와 술잔 앞에 앉으면 / 눈물 나누나 (류근 시, 김광석 곡)
하필 농약집 딸이었던 그녀는 가끔 이상한 사람들을 볼 수 있다고 했었다. 그냥 얼굴을 보면 안다고 했었다. 나는 그녀에게 내 얼굴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녀에게서 농약을 사고 싶었다. 보다 못한 아버지가 수소문하여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녀는 서울로 시집을 갔다고, 이제 그만 마음을 추스르라고. 아버지는 어서 출근이나 하라고 내 구두를 닦아 주면서 세월이 약이라고 중얼거렸다. 그 봄에 나는 술맛을 알아버렸다.
그대 보내고 아주 지는 별빛 바라볼 때 / 눈에 흘러내리는 못 다한 말들 그 아픈 사랑 / 지울 수 있을까
세월이 흐른 뒤 이 노래를 만났다. 사랑은 원래 아픈 것이고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거라고 믿던 내 생각을 흔들었다. 결국 노랫말에 동의했다. 맞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우리를 슬프게 하고 아프게 하고 불행하게 하는 것은 다 우리의 적이다. 참고 견디고 버티면서 잔뜩 힘주어 사는 것이 과연 옳은 인생일까. 그래서 그런지 류근 시인은 술을 잘 먹는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김광석 가수의 목청은 서럽게 떨린다.
어느 하루 비라도 추억처럼 흩날리는 거리에서 / 쓸쓸한 사랑 되어 고개 숙이면 / 그대 목소리
친한 선배한테서 전화가 왔다. 자기 회사에 한번 놀러 오라는 것이다. 어떤 직원이 나를 아주 잘 안다는 것이다.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는데 그쪽에서는 나를 잘 안단다. 이건 불공평한 게임이다. 내가 완강히 저항하자 술 고픈 선배가 실토를 했다.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세상에, 내가 그녀의 첫사랑이라고 하더란다. 나를 만나보고 싶다고 했단다. 아, 아픈 그대!
이제 우리 다시는 사랑으로 세상에 오지 말기 / 그립던 날들도 묻어 버리기 / 못 다한 사랑
나는 그날 술 사준다는 말에 끌려 선배의 회사를 향했다. 그녀가 나를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지금도 그때의 그 물방울이 튀어나올 것 같은 눈웃음을 갖고 있을까, 목소리는 아직도 떼구루루 구를까, 손이라도 잡는다면 그 감촉은……. 문득문득 내 머릿속을 휘저었던 그녀. 운전에 집중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녀의 이름은 아직도 위독했다. 보고 싶어 죽겠지만 나는 운명을 생각했다. 나는 차를 돌렸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조경노동자 장진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