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을 수호해 나라를 지킨 웅치전투의 현장을 찾아서

호남을 수호해 나라를 지킨 웅치전투의 현장을 찾아서 광복절을 맞이해서 완주군에서 기억해야 할 장소가 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호남을 지켜내고 나라를 구한 전투가 있었던 웅치전적지입니다. 이 전투를 치르면서 많은 장수와 병사들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지만 왜군에도 많은 피해를 주어 왜군을 조선에서 물러가도록 하는 계기를 마련했던 역사적으로 대단히 가치 있는 장소입니다. 그 소중한 교훈을 되새기기 위해 웅치전적비를 찾았습니다.

웅치전적비 가는 길

 

웅치전적비를 가기 위해서는 순두부로 유명한 완주군 소양면 화심을 지납니다. 화심의 옛 지명은 구진벌이었습니다. 옛 웅치전투와 관련이 있는 지명입니다. 이곳에서 아홉 번 나아갔다가 아홉 번 후퇴한 구진구퇴(九進九退)의 치열한 전투가 있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구진벌이라는 지명이 생겼습니다. 화심을 지나면 진안으로 가는 길이 두 갈래로 나누어집니다. 여기서 오른쪽 옛 모래재로 가는 길을 따라서 가면 신원리 신안마을입니다. 이곳에서 다시 길이 갈라지는데요. 바로 올라가면 모래재로 가는 길이고요. 오른쪽 길은 일제강점기 때 만든 신작로가 지나는 곰티재 가는 길입니다. 곰티재 가는 길을 따라가면 두목마을이 나오고, 두목마을을 지나면 왼쪽에 웅치전적지 역사 탐방로 안내판이 보입니다. 탐방로 1.2km 구간은 임진왜란 당시 전주와 진안을 오가던 공로가 있었던 곳으로 웅치전투가 있었던 지역입니다.

 

 

 

웅치전적비가 있는 곳은 웅치전투 현장에서 조금 비켜서 있습니다. 역사 탐방로 안내 표지판이 있는 곳을 지나 더 안쪽으로 가면 원신촌마을이 나옵니다. 주변 풍경을 보면 두목마을도 그렇지만 원신촌마을 역시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지형입니다. 원신촌마을부터 곰티재 가는 길은 비포장도로입니다. 길은 산 형세에 따라 구불구불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숲에는 소나무보다는 활엽수 개체 수가 훨씬 많습니다. 빛이 적당히 내려앉은 숲속 풍경이 예쁩니다. 도로 경사가 완만해지고 길가에는 노란 꽃이 가득 피었습니다. 곰티재가 멀지 않았나 봅니다. 꽃길을 지나 조금 더 가면 진안군 부귀면과의 경계를 알리는 표지판이 보입니다. 곰티재에 도착했음을 알려주는 표식입니다. 조그만 주차장 시설과 웅치전적비 안내판도 있습니다. 웅치전적비는 150m 위쪽에 있습니다.

 

웅치전투에서 호남을 지켜내다

경사로를 따라 오르자 우뚝 선 웅치전적비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웅치전적지에 관한 설명도 있습니다. 웅치전적비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25호입니다. 웅치전적지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왜군과 전투를 벌였던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일원을 말합니다. 1592년 4월 13일 조선을 침략한 왜군은 6월 말 경에 전라도를 제외한 조선의 대부분 지역을 점령했습니다. 그러나 선조가 북쪽으로 피신해 있어 항복을 받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전쟁이 길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군 군수품은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발이 묶였습니다.

 

 

 

 

반면에 조선군에는 호남이 있어 의병과 군수품 을 조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왜군은 호남 침략을 계획하게 됩니다. 1592년 7월 8일 새벽 왜장 고바야가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이끄는 왜군이 진안에서 전주로 진출하기 위해 웅치를 공격해 왔습니다. 이때 김제군수 정담, 나주판관 이복남, 의병장 황박이 이끄는 조선군은 진안 세동리에서 완주 신촌리까지 방어선을 구축하고 쳐들어오는 왜군과 혈전을 펼쳤습니다. 결사적으로 맞섰지만 왜군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조선군의 1차, 2차 방어선이 무너지고 최후 방어선인 웅치정상부에서 정담을 비롯한 많은 장정들이 장렬히 전사했습니다. 7월 9일 웅치를 넘은 왜군은 안덕원 근처까지 진출했지만 웅치 전투에서 입은 심각한 전력 손실로 안덕원 전투에서 황진에게 패했습니다. 전주성 점령에 실패한 왜군은 7월 10일 진안으로 철수함으로써 웅치 전투는 막을 내렸습니다. 웅치 전투에서 전주를 지켜내고 또 그 이후에 있었던 이치 전투에도 참여해서 대승을 거두어 왜군의 호남 진출을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웅치전투에서의 승리가 이치 전투에서의 승리로 이어질 수 있었고 결국은 임진왜란에서의 승기를 잡을 수 있었던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그런 의미를 알고 웅치전적비를 바라보니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광복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는 자리였습니다.

김왕중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