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삼례주민분들게 인사말씀 부탁드립니다. 지난 1월에 부임하고 나서 3개월 조금 넘었습니다. 코로나 정국 때문에 주민을 대하는 것도 어렵고 인사드리는 것도 늦었습니다.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빨리 코로나 상황이 종료되어서 주민들하고 화합할 수 있는 장들이 마련되길 기대하고요, 그러면 더불어 우리 직원들도 좀 더 활기차게 일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인터뷰를 통해서 지면으로나마 주민들과 만나시면 좋겠네요. 제가 어떤 질문을 드릴까 고민했는데요, 주민들은 ‘읍장님이 출근하셔서 하루를 어떻게 보내실까?’ 궁금해 하실 것 같아요. 다시 말해 ‘읍장님의 하루’는 어떤가요? 저는 대체로 일찍 일어나는 편입니다. 자연스럽게 예전 본청에 근무할 때처럼 일찍 출근합니다. 사무실에 와서는 맨 먼저 손님 접대도 할 겸 보리차를 끓입니다. 그러고 나서 오늘 할 일, 주요 공지사항들, 읍행정복지센터에서 챙겨야 할 사항들을 메모합니다. 이어서 각 부서 팀장님들과 티타임을 가지면서 편안한 분위기에서 업무적 소통을 하고 있습니다. 꼭 업무만이 아니라 일상적인 소통도 함께 하면서 팀워크를 다지곤 합니다. 코로나 때문에 행정 업무도 많아지셨을 것 같은데요. 기본적으로 삼례읍 1만
삼례에는 삼례사람들도 잘 몰랐던 농악단이 있다. 바로 신금리 별산마을 신강휴 단장이 이끄는 ‘삼례농악단’이다. 삼례농악단은 이번 <완주군민 농악발표 한마당>에 참가해 은상을 받았다. 2019년에 대상을 받았던 삼례농악단은 잠시 단원 구성에 여러운 고비를 겪다가 올해 옛 모습을 되찾아 수상으로 이어진 실력 있는 농악단이다. <삼례사람들>은 신강휴 삼례농악단 단장님을 별산리 자택에서 만나 농악단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기자가 별로 질문을 하지 않았어도 단장님께서 풍물의 옛 역사와 장점, 삼례농악단의 앞으로의 계획까지 술술 이야기 해 주셨다. 예부터 전해내려온 풍물 역사책을 보면 신라 백제 그때 당시에 전쟁을 할 때 꽹가리, 징 이것을 해가지고. 모이자 그러면은 이렇게 깨갱~ 해 갖고 징은 알았다고 징~ 하고 했어 옛날에. 농민들 모내기 하다가 막걸리 먹고 흥타령를 하고. 또 명절 때 설에 또 보름날 당산 시제를 모시죠. 거기서 이제 북도 주고. 저 우리 부락에 잡귀들 구신들 물러가고 잘 되라고 풍장을 치잖아요. 그리고 이제 마당밟기라 해갖고 그 동네 한 마을에 안굿이 있고 바깥굿이 있어요. 그래서 보름날 이렇게 굿을 차리면 그 집 안에 액운이
주민들은 로터리클럽에서 어느 기관에 물품을 기부했다는 뉴스를 자주 접한다. 기사와 함께 로터리클럽 회원이 조끼를 입고 기부 물품과 함께 찍은 사진도 꼭 등장한다. 그래서 궁금하다. 로터리클럽은 어떤 곳일까? 늘 봉사를 한다니 어떤 사람이 회원일까? 그리고 로타리클럽의 ‘로타리’는 대체 무슨 뜻일까? 로타리클럽은 현재 전 세계에 회원이 120만 명에 달한다. 이러한 세계적인 조직의 시작은 1905년 미국 시카고의 변호사 폴 해리스의 아이디어였다. 그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전문인, 사업가들이 모여 아이디어를 주고받으며 평생 우정을 쌓아갈 수 있는 자리를 구상했다. 그리고 그 모임을 봉사단체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더 나은 미래를 찾아 농촌을 떠나 시카고에 정착한 젊은이들이 많을 것이다. 이들을 한데 모으면 어떨까? 그들도 나처럼 고향의 푸근한 인심에 목말라 있다면, 무언가를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1905년 2월 23일, 폴 해리스와 광산 엔지니어이자 프리메이슨인 구스타버스 로어(Gustavus Loehr), 석탄 판매 사업가 실베스터 쉴리(Silvester Schiele), 그리고 양복 재단사 하이램 쇼리(Hiram Shorey)는 시카고 시
▲ <별이네>의 전별 대표 삼례시장 청년몰에 새로 입점한 가게가 있다. 로컬기프트샵 <별이네>. 별이네 대표 전별 씨는 “저희는 완주군 관광 기념품을 비롯해서 지역의 좋은 상품들을 발굴해서 판매합니다. 저희가 직접 디자인하고요, 또 지역의 알려지지 않은 분들의 상품도 알리려고 해요.” 가게 안에는 직원 두 명이 한창 디자인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고, 한쪽 벽에는 개발을 마친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언뜻 봐도 처음 일을 시작하는 분들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왜 청년몰에 입점하였을까? “지역이 쇠퇴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시장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고, 교류가 일어나는 곳이잖아요. 저는 시장이 갖고 있는 가치를 믿어요. 그거 하나 보고 들어왔어요. 청년몰이 발전하기 위해서 큰 지원보다는 우리가 어떤 제안을 할 때 잘 귀기울여 주시기만 해도 상인들에게는 해 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길 것 같아요.” 별이네 전별 대표는 지역의 상품제작자, 디자이너들이 <별이네>를 통해 자신들이 하고싶은 것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덧붙여 말하길, “적당히 일해서 적당히 사는 건 별로예요. 저는 적
6월은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지금 세대는 한국전쟁이 먼 옛날에 있었던 남의 일이지만 그 시대에 살아남아야 했던 임영자(80세) 님과 고석중(90세) 님께는 남다른 6월입니다. 삼례에 사시는 두 분을 만나 뵙고 그 시대가 어떠하였는지 이야기를 들어 보았습니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편찮으시다 들었는데 건강해 보이셔서 좋습니다. 어머님은 너무 고우세요. 두 분 성함하고 연세 고향이 어디인지 말씀해 주세요. 나는 임영자이고 80세, 우리 영감님은 고석중이고 90세예요. 나는 삼례에서 태어났고, 우리 영감님은 고향이 제주도예요. 제주도요? 두 분 어떻게 만나셨어요? 영감님이 병원에 계실 때 부상당한 삼례 사람이 치료를 빨리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대요. 덕분에 그 사람은 목숨을 건졌고, 우리 영감님을 생명의 은인이라고 생각했어요. 전쟁이 끝나고 제주도에 있는 영감님을 삼례로 초대했는데 그때 만났어요. 친정아버지가 신문지국장이었는데 저 양반이 매일 우리 집으로 신문을 사러 왔어요. 나는 중학교 졸업하고 양재 학원에 다니면서 기술을 배우고 있었어요. 우리 아버지가 사범학교 보내준다고 늘 말씀 하셨는데 정작 학교 갈 때가 되니까 학교를
“나는 항상 삼례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내 고향은 석전리이니까 석전초등학교(삼례동초등학교) 다니면서 전주로 통학했어요. 교통이 안 좋아서 자전차 타고 삼례역전까지 와서 기차 타고 학교 다녔어요. 기차가 연착하면 어떨 때는 학교를 12시에 가곤 했어요. 그때는 힘든 줄도 몰랐죠. 우체국 옆에는 삼례극장이 있었어요. 석전리에서 걸어와서 극장에 영화 보러 다니고 그랬는데. 군대생활하고 한의대 졸업하고 1년 서울에서 수련생활 한 거 빼면 거의 삼례를 떠난 적은 없어요. 지금 집은 전주지만 거의 삼례사람인 거죠. 완주에서 가장 오래된 한의원 84년 6월에 오픈했으니까 37년쯤 됐나? 원래는 천일약국 앞에 석전시계당에서 1년 하다가 시장 안으로 들어와서 대우슈퍼 있죠. 그 옆에서 좀 하다가 93년도에 이쪽에 집을 지어서 왔어요. 여기 와서 한 지도 거의 20년 되네요. 그때 여기는 시장이 아니었고. 이쪽은 아주 황망했어요. 의료기관이 귀할 때인데 큰 역할을 하셨겠네요 제가 개업했을 때 단독으로 개업한 사람은 나 혼자였어요. 한약방은 있었지만 한의원은 한두 군데 있다가 없어지고…. 완주군에서 거의 혼자 칠팔 년, 한 십 년 있었나? 완주군에서 거의 나 혼자 하다시피 했어요
가게에 들어가니 사장님 혼자서 주방에 큰 다라이를 놓고 앉아 무를 강판에 갈아 채를 만들고 있었다. <삼례사람들>이라고 소개하니 어리둥절해하면서 어제 기자랑 통화한 분은 친동생이라고. 기자는 주방과 홀을 나누는 선반에 팔을 얹고 선 채로 우물쭈물했다. 사장님은 계속 무를 갈면서 “반미, 미국 반대 반미 아니에요~”라며 웃었다. 반미가 베트남 사람들이 주로 먹는 빵인가요? 베트남에서는 빵이나 국수를 아침에 많이 먹어요. 바쁜 사람들, 직장 다니는 사람들 출근해야 하는데 먹을 거 없잖아요. 회사 근처에 반미 빵집 많아요. 이거 빵 하나 사서 회사 갈 수 있게. 아니면 국수 한 그릇 먹고 가. 그렇게 많이 해요. 점심에는 그냥 밥을 먹지만 대부분에는 빵, 국수 많이 먹어요. 반미 빵집을 베트남에서 오신 분들이 많이 하시나 보네요. 경기도 쪽에 있기는 한데, 여기서는 없어요. 전라북도는 없을 걸요? 빵이 있기는 해요. 없는 건 아닌데. 근데 저처럼 직접 반죽하고 굽고 하는 그런 가게는 없을 걸요? 빠리바게트에서 주문해서 파는 거는 있기는 해요. 저처럼 직접 만들고 파는 거는 없을 것 같아요. 자부심이 있으시겠어요. 그런가? 이 빵 만들기는 힘들어요. 간단
구와리에 유미나 씨 댁은 경로당 뒤편에 있었다. 전화를 해 보니 “아, 보여요. 들어오세요.”라고 한다. 넓은 마당을 지나 집 거실에 유미나 씨와 마주 앉았다. 생강차를 내어 오는 동안, 기자는 어린이 책 전집이 꽂힌 책장과 피아노, 그리고 너댓살 된 두 아이 사진이 걸려 있는 거실 풍경을 재빨리 훑어보았다. 가장 편한 아이 질문부터 시작해서 농사일, 베트남에서 이주하게 된 사연까지 이야기가 이어졌다. 아이가 초등학교 다니나 보네요? 아이 둘 다 6학년이에요. 내년에 삼례중학교에 가요. 농사는 딸기 하시겠네요? 여기는 거의 대부분 딸기예요. 시집 온 때부터 계속 하고, 시부모님 때부터 오래 전부터 했었어요. 남편이 하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죠. 처음에 왔을 때는 힘도 많이 들고 말도 모르고 힘든 일 많았죠. 고향에서는 어떻게 사셨어요? 베트남에서 원래 시골에서 살았어요. 그때는 공부만 했었죠. 부모님 조금씩 도와주는 수준. 베트남 있을 때 공부만 했으니까 한국에 왔을 때 농사일도 익숙하지 않고… 13년 되었어요. 이제는 익숙해졌어요. (한국말 잘 하시네요.) 우리말 많이 못해요. 그때는 공부만 했었죠. 살던 곳 이름은 하이퐁. 하노이 쪽에 있어요. 하이퐁
삼례시장 청년몰에는 가죽 공예 공방 <레가로>가 있다. 기자가 찾아갔을 때 공방 주인 허효정님은 한창 일을 벌여놓은 중이었다. 재단한 가죽들과 공예 도구들이 작업대 위에 어지러이 놓여 있었다. “2019년 11월에 공방 문을 처음 열었어요. 원래는 삼례에 제 작업실을 두고 부업으로 시작했어요. 외부에서 주문 받은 것을 작업하고, 수업도 나갔어요.” 가방, 손지갑 등 여러 가죽 제품들이 매장을 채우고 있었다. 그중 가장 많이 찾는 제품은 폰케이스라고. 공방 주인은 가죽 제품만의 매력을 이렇게 설명했다. “가죽이 소재가 다양하잖아요. 다양한 소재를 이용해 제가 원하는 것이면 소품이든 뭐든 다 만들 수 있어서 좋아요. 특히 통가죽은 시간이 갈수록 낡아간다기 보다는 늙어간다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매력이 있어요.” 어떤 제품이 만드는 데 가장 시간이 많이 걸리는지 궁금했다. 아마 큰 가방 종류가 오래 걸릴 것 같았는데…. “제품 구조가 단순할수록 작업이 짧아요. 의외로 쇼퍼백이나 클러치 같은 가방 종류가 빨리 끝나요. 크기는 작아도 핸드폰 케이스는 카드, 지폐 칸 넣고 지퍼 돌려 달고 하면은 꼬박 이틀 걸리기도 해요.” 짧게 걸린다는 가방도 재단하고 박음질
지난 해 군에서 <완주 기네스 재발견>을 발간했다. 각 분야에서 가장 최고의 기록들만을 모은 것이다. 그중에서 삼례에 있는 ‘최고 기록’은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자. 시계점 개업은 경찰서에 신고 명화당을 운영하는 장동용 님은 우체국 맞은편에 있던 형님 가게에서 기술을 배워 1977년 현재의 자리에 개업을 하였답니다. 당시엔 시계가 귀중품이라 영업 신고를 경찰서에 했는데요. 업태가 고물상이었대요. 지금이야 시계가 흔전만전이지만 당시만 해도 혼수품으로 가격이 제법 나갔고 혹시 도둑맞거나 하면 장물로 나올 수 있어서 경찰서에서 관리를 했다고 해요. 가장 기억에 남는 손님 43년째 영업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남편의 폭력을 피해 혼수품을 팔아 도망가려는 아줌마에게 ‘남편이 용서를 빌고 합칠 수도 있으니 사지 않고 보관해 주겠다.’고 하며 필요한 금액을 빌려 주었대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아주머니가 다시 와서 남편이랑 화해했다고 물건을 찾아 갔답니다. 몇 번씩이나 고맙다고 인사하면서요. 가게에 있으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는데 본의 아니게 인생 상담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잘 해결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도 했답니다. (사진=손안나 기자)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