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암사로 오르는 돌계단 입추가 지나서 그런지 아침저녁 불어오는 바람결이 시원하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그늘이 없는 곳을 걷는 것은 여전히 부담스럽다. 그래서 시원한 그늘이 있는 곳을 찾게 된다. 그런 장소로는 완주 화암사 숲길도 좋다. 완주 화암사 가는 숲길 입구에는 넓은 주차장이 있다. 화암사는 이곳에서 800여 미터 떨어져 있다.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이기 때문에 걷기에 전혀 부담이 없다. 주차장에서 화암사로 향하는 길은 두 개로 갈라져 있다. 하나는 차가 다닐 수 있는 정도로 넓은 길이고, 또 하나는 계곡 건너편으로 걷는 좁은 산책로다. 지금 시기에는 좁은 산책로를 따라 걷는 것이 좋겠다. 산책로를 따라 맥문동 꽃이 예쁘게 피어 있다. 천천히 꽃길을 걸으면서 꽃과 대화를 나누어본다. 보랏빛 꽃 색깔이 주변 색과 잘 어울린다. 산책로는 계곡을 건너 계속 이어진다. 계곡을 건너는데 계곡물 소리가 시원하게 전해왔다. 잠시 계곡물에 손을 담가 보기도 하고, 계곡물이 연주하는 음악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숲길을 걸으면서 듣게 되는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는 마음을 참 편하게 해준다. 계곡을 지나서도 맥문동 꽃길은 계속된다. 보랏빛이 꼬리를 물고
우리는 살아가다 보면 시간에 쫓기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는 직장일로, 누군가는 학업 때문에 산더미처럼 싸인 과제들을 해결하느라 생각할 시간도 없이 시간에 쫓기고 또 쫓긴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정신을 차리게 되면 왜 이렇게 시간이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는지, 시간을 아끼지 못해 후회한다. 미하엘 엔데가 쓴 소설 『모모』는 위처럼 시간에 쫓기는 현대 사람들에게 잊고 있었던 가치들과 시간에 대한 고찰을 담아 소설로 표현하였다. 이야기는 버려진 원형극장 옛터에서 시작된다. 그곳엔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모모라는, 누더기를 쓰고 삐쩍 마른 여자아이가 있다. 베포 할아버지와 안내원 기기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그곳에 있는 모모를 발견하고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모모는 남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경청하는 능력이 있어 마을 사람들과 아이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는다. 그런데 어느 날 마을에 기다란 시가를 문 시간저축 은행의 회색 사람들이 나타나 시간을 절약할 것을 마을 사람들에게 일러주고, 정확히 낭비되는시간을 계산하여 설득해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마을 사람들은 서서히 이들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그 뒤 마을 사람들은 시간에 쫓기는 삶을 살게 되며 여유를 잃어버린다. 모모는
번역 [명사] 어떤 언어로 된 글을 다른 언어의 글로 옮김. 얼마 전 한국시를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외국인 교수를 만났다. 떠듬거리는 한국어와 영어 그리고 프랑스어 사이를 눈치껏 오가며 서로 소통하며 웃고 떠들었다. 물론 약간의 술이 가미되었음은 물론. 술은 때로 사람을 과감하게 만들지 않던가. 영어는 귀동냥하는 수준이고 프랑스어는 귀머거리 수준이었으므로. 시를 이야기했고 이방인이 한국 생활에서 오는 낯섦과 한국어 음절이 외국인에게 들리는 묘한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한국인에게 프랑스어가 들리는 리듬감처럼 한국어도 외국인의 귀에 들리는 즐거움은 상당하다고 했다. 그러다 한국어의 깊이를 이야기했고 한국시의 깊이를 이야기 했으며 그로 인하여 얻는 번역의 고충을 토로했다. 그러다 그녀가 던진 말‘번역은 반역이다’. ‘그렇지, 번역은 반역이지. 한국인만의 정서를 프랑스어로 바꾼다고 한국인의 정서를 이해해? 한국어의 뉘앙스를 프랑스어의 뉘앙스로 바꿀 수 있어야만 진정한 번역이지 않을까?’ 술김도 있었고 번역에 대한 여러 가지 상상의 나래가 펼쳐져 그녀의 말은 이제 들리지 않는다. ‘문학작품만 번역하지 않고 나를 번역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까?’, ‘정말 어
대동세상 大同世上 명사, 모든 사람이 함께 어울려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 진안 천반산에는 조선 선조 때의 문신 정여립(1546~1589)이 있다.‘천하의 주인이 따로 없다’는, 왕권체제하에서는 불온하기 짝이 없는 언사를 서슴지 않았던 반체제적인 인물 정여립. 금방이라도 폭발할 화약처럼 위험한 사상으로 장전되어‘대동세상’을 꿈꾸던 인물이었지만 한편으론 개혁과 실용을 앞세운 조선왕조 최초의 공화주의자이다. 그의 말은 선비사회인 조선에게는 벼락 치는 소리였고 천둥소리였다. ‘어찌 임금 한 사람이 주인이 될 수 있는가? 누구든 섬기면 임금 아니겠는가!’ ‘천하는 공물(公物)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 ‘인민에게 해가 되는 임금은 죽여도 괜찮고, 올바름을 실행하기에 부족한 지아비는 떠나도 괜찮다’ ‘백성과 땅이 이미 조조와 사마씨에게 돌아갔는데, 한구석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유현덕의 정통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정여립. 그는 서인(西人)의 수장이었던 율곡 이이의 후원으로 승승장구했다. 거칠 게 없었으며 선조 앞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이율곡도 그를‘당대 천재’라 말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러다 율곡이 죽자 그는 동인(東人)으로 정치노선을
용규 씨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지 5년째다. 아직 50대 나이에 혼자가 된 용규 씨는 얼굴이 좀 어두워졌을 뿐 별로 달라진 것 없이 살아왔다. 20대인 두 딸은 이제 아빠가 새 여자친구를 만나도 된다고 했다. 주위 사람들도 좋은 사람을 만나서 새 출발 하라고 부추겼다. 그러나 용규 씨는 별로 내키지 않았다. 다시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하며 산다는 것이 여간 부담스럽지 않았다. 한사코 여자를 쳐다보지 않으려 애썼다. 다시 또 누군가를 만나서 / 사랑을 하게 될 수 있을까 /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아 그러던 용규 씨가 친구를 통해 그녀를 수소문한 것은 지난봄부터다. 친구와 같은 업종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의 근황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막상 연락이 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놓은 것도 없으면서 그녀 소식이 궁금했다. 친구와 만나 대포 한 잔씩 나눌 때마다 졸라댄 끝에 전화번호를 받았다. 뭐라고 말하지? 그녀도 결혼해서 아이와 남편이 있겠지? 나를 기억하기나 할까? 내가 혼자가 되었다고 하면 그녀의 반응은 어떨까? 장맛비가 몹시 쏟아지는 날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참 조심스럽게, 떨리는 손가락으로, ‘우리 한번 만나도 괜찮을까요?’
생태와 건강 내게도 ‘사추기(思秋期)’가 왔다. 13세 막 피워낸 꽃봉우리 같던 사춘기(思春期)의 다른 쪽 사추기! 가슴이 봉긋하게 오르고, 허리가 잘록해지던 그 시절과 다르게 복부는 지방으로 차오르고 피부는 얇아지며 콜라겐이 지탱해주던 탄력은 급격하게 꺼지면서 주름이 늘어간다. 점막도 퍼석퍼석 건조하고, 갈라져 당긴다. 내 난소가 노화에 의해 호르몬 생산을 못 하고 있다는 증표를 다 보여주고 있다. 내가 모르고 있었지만, 사춘기 시절부터 여성호르몬이 피부, 점막을 보호했다는 건데, 알고 보니 이것뿐이 아니었다. 혈관, 신경, 뼈, 관절들이 이 귀한 호르몬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 50대를 전후한 갱년기 때부터 현저하게 혈중 콜레스테롤량은 많아지고, 혈관의 탄력도 떨어져 고혈압, 협심증, 심근경색 등 심혈관계 질환이 이 나이대 남성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발생한다. 이 시기엔 갑상선 기능도 온전하기 힘든지 먹는 것도 없이 대사량은 줄고, 아랫배가 도톰해지고 체중은 늘어나면서 몸은 무겁고 기운이 없다. 그러니, 짜증스럽고 무기력하고 우울해지기 십상이다. 잠도 들기 힘들다. 이러다 치매 걸리는 것 아닌가 싶게 기억력도 떨어졌다. 앞으로 인생의 1/3을
호남을 수호해 나라를 지킨 웅치전투의 현장을 찾아서 광복절을 맞이해서 완주군에서 기억해야 할 장소가 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호남을 지켜내고 나라를 구한 전투가 있었던 웅치전적지입니다. 이 전투를 치르면서 많은 장수와 병사들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지만 왜군에도 많은 피해를 주어 왜군을 조선에서 물러가도록 하는 계기를 마련했던 역사적으로 대단히 가치 있는 장소입니다. 그 소중한 교훈을 되새기기 위해 웅치전적비를 찾았습니다. 웅치전적비 가는 길 웅치전적비를 가기 위해서는 순두부로 유명한 완주군 소양면 화심을 지납니다. 화심의 옛 지명은 구진벌이었습니다. 옛 웅치전투와 관련이 있는 지명입니다. 이곳에서 아홉 번 나아갔다가 아홉 번 후퇴한 구진구퇴(九進九退)의 치열한 전투가 있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구진벌이라는 지명이 생겼습니다. 화심을 지나면 진안으로 가는 길이 두 갈래로 나누어집니다. 여기서 오른쪽 옛 모래재로 가는 길을 따라서 가면 신원리 신안마을입니다. 이곳에서 다시 길이 갈라지는데요. 바로 올라가면 모래재로 가는 길이고요. 오른쪽 길은 일제강점기 때 만든 신작로가 지나는 곰티재 가는 길입니다. 곰티재 가는 길을 따라가면 두목마을이 나오고, 두
쌀 수탈의 수단으로 건설된 철도 삼례에 철도가 처음 개통된 것은 1914년이다. 처음에는 전북경편철도주식회사가 운영하는 사철(私鐵)로 영업을 시작했다. 일본인 농장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서였다. 1899년 군산항이 개항되면서 군산항을 통해서 농산물을 일본으로 반출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일본인들은 내륙 농장에서 생산된 쌀을 군산항을 통해서 일본으로 반출하기를 원했다. 당시 삼례에는 이엽사농장이 있었고, 동산에는 미쯔비시 계열에서 운영했던 동산농장 있었다. 인근 춘포에는 호소카와농장과 이마무라농장, 다사카농장 등이 있어 이들은 서로 뜻을 모아 사철(私鐵)을 운영하게 되었다. 일본인 농장에서 수확한 쌀을 현미로 가공해서 창고에 보관했다가 기차를 이용해서 군산항으로 보내졌고, 그 쌀들은 다시 군산항에서 배를 이용해서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일본인 농장은 쌀 수탈의 전초기지였고, 당시 철도는 수탈을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삼례역 주변에 옛 창고들이 많이 남아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만경강 철교 준공 경편철도는 그 이후 1927년 조선총독부에서 인수해서 국철로 흡수되었고 명칭도 경전북부선으로 바뀌었다. 1929년에는 협괘 레일을 표준괘로
노래 [명사] 1. 가사에 곡조를 붙여 목소리로 부를 수 있게 만든 음악. 또는 그 음악을 목소리로 부름. 2. 가곡, 가사, 시조 따위와 같이 운율이 있는 언어로 사상과 감정을 표현함. 또는 그런 예술 작품. 비가 왔었다. 아니 비가 안 왔었다. 아니다 비가 온 것 같기도 하고 비가 안 온 것 같기도 하다. 중3에서 고1로 올라갈 즈음이었고 나는 그 해 고입고사를 봤다. 시험을 앞둔 아침, 지금은 노모가 된 엄마와 한바탕 전쟁을 치렀다. 그리고 학교에 입장해 또 한 번의 전쟁을 치렀다. 시험이 끝나고 발걸음은 무거웠고 왁자지껄한 친구들과 달리 나는 얼굴이 굳어있었다. 지금은 이유도 떠오르지 않지만, 어머님께 미안함이 앞섰고 시험을 앞두고 괜한 오기를 부렸나 싶은 후회를 했던 것 같다. 느릿느릿 학교 정문을 나서자 누나가 서 있었다. 누이는 고맙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앞서 걸었다. 누이의 발걸음을 따라가다 보니 익산역 앞, 새서울악기사였다. 누이는 고2였고 나는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사춘기 소년이었다. 중3였던 나는 음악을 몰랐다. 라디오조차 들을 줄 몰랐다. 그런 내게 누이는 수많은 카세트테이프와 LP판 앞으로 이끌었고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박 이사가 자신의 방을 정리하다가 오래된 레코드판 하나를 발견한다. 아마 정품도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친구네 집에서 빌려와 놓고선 돌려주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박 이사가 빙그레 웃음 짓는다. 필리핀 가수 프레디 아길라의 첫 음반, “사랑스런 나의 아들아 네가 태어나던 그날 밤 우린 기뻐서 어쩔 줄 몰랐지…….”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 코드 진행이 간단해서 쉽게 따라 부르고 흥얼거렸던 노래, 그러나 정작 그 가수에 대해서는 잘 몰랐던 노래, 어렸을 적 박 이사가 라디오를 들으며 막연하게나마 필리핀을 동경하기도 했던 노래, ‘아낙(Anak)’이다. ‘아낙(Anak)’은 필리핀 타갈로그어로 ‘자식(아들)’이라는 뜻이란다. 이 노래는 아들이 태어나서 매우 기뻤던 기억부터 자식이 성장하여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품을 떠난 뒤의 걱정까지 담고 있다. 말하자면 아버지의 노래인데, 가수 자신이 법조인을 원하는 아버지의 뜻을 거슬러 가수의 꿈을 안고 가출했던 경험을 담았다고 한다. 아버지의 속을 썩이지 않은 아들이 세상 어디 있을까? 박 이사도 아버지를 떠올린다. 한때는 지상 최대의 적이었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상당히 불쌍한 남자로 기억되는 존재. 앗! 박 이